이 이야기는 어쩌면 음반과 관련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또 세상 살이에 관련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시골에 내려와서 살다보니 집중적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이 과거 서울에 살 때 보다 좋은 편이다. 그래서 그간 사놓고 한 번 정도 듣고 치워둔 음반들이 적지 않았는데, 시골에 내려온 후 이런 음반들을 찬찬히 들으면서, 세상의 평판이라는 것이 시간속에서 그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또한 대중에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통념이 반드시 모두에게 다 수긍이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쇼팽이라는 폴란드 출신의 사실상 프랑스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과거 그리 좋아하는 레퍼토리는 아니었다.
무언가 소모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이 짙게 풍기는 그의 짤막하고 감각적인 피아노 음악은 과정과 결과의 구성이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납득 가능해야 직정이 풀리는 성향의 나같은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주기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명한 음악가니까 또, 내가 좋아하지 않아도 남들이 꽤 많이 좋아하니까 무슨 음악인지는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 음반을 몇 장씩 사서 모으기도 했다. 대체로, 쇼팽은 루빈스타인을 필두로, 상송 프랑수와, 폴리니, 아르헤리치, 아쉬케나지 등이 대중적으로 명성이 높은 편이고 그외 이름이 널리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도 제법 있다. 가령, 내가 편애하는 클라우디오 아라우, 이반 모라베츠나 타마스 바사리 등이 그렇다.
시골에 내려와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쇼팽 피아노 솔로 전집을 다시 꼼꼼하게 들었다.
최고의 음반을 찾아서 듣고 그것을 내것으로 소유하고 싶어하는게 음반으로 음악을 즐기는 사람의 숙명이겠지만, 어느 정도 그런 고행을 반복하다보면 문득 깨닫는 것이 생기기도 하는데, 결국 모든 음반은 다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명반으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어도 똥반은 없다는 것이다. 아쉬케나지는 피아노에서도 또 지휘에서도 다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정작 최고의 자리에 그의 이름이 있지는 않다. 그런데, 피아노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사실 아쉬케나지보다 피아노를 더 잘치고 더 레퍼토리가 넓은 연주자가 과연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하이든이 너무 많은 명곡을 남겨서 모짜르트, 베토벤 보다 대접을 못받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적 존재 가치가 그들에 비해 전혀 모자르지 않은것과 같이 피아노계에서 아쉬케나지의 존재가 하이든과 같은 존재가 이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쇼팽에 관한 한, 아쉬케나지의 전집만 있으면 더이상의 음반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더이상은 다 과소비고 허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연주자의 음반을 더 구하는 것을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밥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이라도 빵과 국수도 골라 먹는 경우가 있으니까.
우리는 더 좋은 것, 그러니까 현재 자신이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늘 새로운 더 좋은 것을 찾는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지나간 것들 중에 욕심으로 눈이 흐려져서 제대로 그 본래의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있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피아노곡 음반들이 그런 경우에 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술과 개성적인 표현의 비중이 중도적이면서 만들어 내는 피아노 음색이 다채롭고 계조가 풍부하여 강약의 대비가 자극적이지 않은 그의 음반은 딱히 흠잡을 곳이 없지만, 어쩌면 그때문에 역설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나는 쇼팽에 이르러 이런 아쉬케나지의 특성은 더욱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감상이 지나치면 애상이 되고, 그 애상에 집착하면 궁상이 되는것이 아닐까? 13매에 이르는 쇼팽 피아노 솔로곡의 연주들을 들으면서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같은 곡의 다른 유명 연주와 비교하는 짓을 했음을 밝힌다. 개별적인 음반들의 경우, 더러는 아쉬케나지보다 더 개성적이고 그래서 느낌이 좋은 경우도 많이 있었다(디누 리파티가 녹음한 왈츠의 경우나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연습곡과 녹턴 및 폴리니의 전주곡 등). 그런 경우 아쉬케나지의 연주 녹음은 다른 연주 녹음 보다 다소 점잖고 절제된 표현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평범하고 좀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음식의 경우에도 짜고 단 음식이 입에는 먼저 끌리지만 먹고나면 심한 갈증을 느끼고 더러는 속이 불편하기도 한 경우가 있고, 심심한 맛의 음식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주는 건강한 맛인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음악도 표현을 통해서 감동을 전달하는 예술 장르라는 면에서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 기술로 표현하는 음악이 듣는 사람에게 감동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과도한 꾸밈이나 장식보다는 음악 본연의 형태를 가장 솔직 담백하게 제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쇼팽의 피아노 솔로의 경우, 요란하거나 병적이지 않은 건강하고 평이한 아쉬케나지만 있어도 충분했구나라고 스스로에게 나직하게 되뇌었다. 그래서 혹 누군가가 쇼팽의 피아노 솔로 전집을 구하려고 한다면, 무난하게 아쉬케나지의 데카반 전집이면 충분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결국 돌고 돌아서 멈출 곳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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