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禪雲寺)
오늘 아내와 선운산(사실은 도솔산이다) 산책을 마치고 하산하는 길에 얼핏 선운사 대웅전 뒷편에 장엄하게 펼쳐진 동백숲을 보면서 40여년전 어린 나이에 드문 교통편을 무릅쓰고 선운사를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시절 심취했던 미당 서정주의 시 중 교과서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다른 시선집에서 읽었던 <선운사 동구>라는 시를 가슴에 품고 있었고, 그래서 선운사의 동백꽃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 선운사를 찾았었다. 동백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동백꽃은 겨울에 피는 것으로 알고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눈이 내린 선운사를 찾았으나 정작 동백꽃은 보지 못했고 그 때 소박한 규모의 고즈넉한 겨울 사찰이 주는 시리고 애틋한 감상만 간직한 채 돌아왔었다.
오늘 군데 군데 동백꽃이 붉은 빛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문득 40여년 전으로 내 기억이 빠르게 돌아갔고, 내가 선운사를 품고 있는 고창으로 이사온 것이 아주 아무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련하게 가슴에 흩어진 불완전한 형태의 흔적으로 남았던, 그러나 기억에서 이미 흐려진 미당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를 인터넷을 검색하여 찾아 읽어 보았다.
참 좋았다. 시를 읽어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선운사 동구(洞口)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그런데, 선운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진입로 한쪽에 미당 서정주의 친필을 받아 돌에 새긴 시비를 발견했다.
단기 4307년에 만들었다고 하니1974년에 제작된 것이다. 한 때 가장 한국적인 서정이 진득한 시를 쓴 문인으로 추앙을 받았던 그가 말년에 <친일>딱지를 얻고서 그의 존재와 아울러 그의 작품까지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소외되어가는 거이 완연한데, 나는 여기서 부박한 인간세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젊은 시절 한 때 일본의 압력에 의해 친일성향이 농후한 글을 쓴 사실이 있다고 하여 그의 작품이 전체로 외면되어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시비도 사람들이 오가는 길의 한편에 있으되,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인식하기 어렵게 어정쩡한 위치에 투박하게 놓여 있었다.
미당이 직접 쓴 글씨를 돌에 새긴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이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