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廉恥)라는 말은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것을 말한다.
결국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지의 여부에 따라 사람의 평가와 값이 달라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염치는 개나 줘 버리고
적당한 처세와 간교한 말로 자신을 속이면서 사는게 지혜롭게 사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그 염치를 아는것은 이성적인 각성의 차원을 넘어선 인성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일본 사람들은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가장 심한 욕이라고도 한다.
내가 사는 이 시골에 나보다 20세가 많은 노인 회장이 계신다.
이 분은 대체로 사람들에게 그렇게 높은 명성이나 평판을 얻고 있지 못했다.
내가 직접 경험한 바로는 남들이 쉽게 말하듯이 성격이 괴팍한 노인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집에서 태어나 남의집 일을 해주면서 자기 땅 한뙤기 없이 농사를 지었단다.
아마 소작이라기 하기도 어려운 상황으로 어렵게 살았던 것으로 짐작이되고,
글도 읽지 못하며 서명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나 간신히 그릴 줄 아는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우리가 이사를 왔을 때 그 노인 회장이 성격이 고약하니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노인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노인 회장을 상대했다.
마을의 연장자로서 합당한 예의를 갖추어 노인을 깍듯이 대했다.
그 노인 회장은 그런 나와 내 아내를 무척 아끼고 좋아했다.
마을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 형성이었던것 같다.
해를 거듭할 수록 사람들의 관계를 파악하게 되면서 노인 회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시골에서 만난 유일한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양반은 위악적으로 처신을 했을 뿐이다.
시골이나 도시나 사람 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양상이 비슷한 법.
노인 회장은 남의 일을 해주는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낮은 사람으로 대우를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 내외는 그 노인 회장을 과거와 연관이 없이
우리가 보고 느낀대로, 그리고 연장자에 합당한 대우로 상대해왔다.
아마도 노인 회장은 자신이 우리 내외에게 가장 온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느낀것 같다.
남을 대하는데 있어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처신을
세평이나 자기 이해 득실에 편승해서 편의적으로 바꿀 때,
그 인간관계는 파탄이 나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당연히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간교한 인간 세상은 삶의 편의를 위해서 이런 체면에 어긋나는 상황을 얼버무린다.
나도 알고 남도 아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으면서 그냥 덮고 넘어가는 걸 좋은 처세라고 하면서....
나는 그런 좋은 처세를 유난히 잘 못한 부류에 속한다.
중학교 때는 청소를 하다가 같은 반 친구와 주먹 다짐을 한 일이 있었다.
책상을 뒤쪽으로 밀어놓고 빗자루 질을 한 후 대걸래로 물청소를 하는 친구가
너무도 무성의하게 물칠을 대충하고 청소를 다했다고 떠들고 있었다.
그 꼴을 그냥 보지 못하고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는것을 따지다가 주먹 다짐을 했다.
왜 그랬을까? 종종 어린 시절 그 기억이 나의 삶의 국면마다 떠오른곤 했었다.
타협하지 못하는 성정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의 특징이었다.
그런 나와 결혼한 아내는 결혼 후 10년간 내가 무척 낯설고 어려웠었다고 했다.
그러나 10년의 세월 동안 나를 겪어 보면서 이제는 그것이 이해가 된다고 했었다.
본가에 들고 나는 고단한 시집 살이도 기꺼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묵묵히 감내한 것은 바로 아내가 염치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시골에 내려와서는 말 수가 없던 아내가 이런 저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좋고 싫은 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을 뿐 나와 크게 다르지 않게 좋고 나쁜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는것 같다.
형제의 죽음을 마주하고 적당한 체면 치례로 부의금을 건네려던 사람을 이제는 잊기로 했다.
별스럽게 지분 때문이라는 말로 제 형제의 장지를 이리 저리 농단한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경황이 없는 중에 장지 문제를 일임했던 나는 그 순간 뇌리를 때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가스파르 같은 자의 "배려" 발언은 차라리 애교스러운 지경이었다.
아내를 모욕한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믿는 신에 의하여 합당한 대가를 받을 것으로 믿는다.
인생은 절대 허접한 처세로 잘 살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 결국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한다면
염치 없는 삶을 뻔뻔스럽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염치 없는 자들을 보면서 사는것, 이것도 참 고단한 일이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을 곱씹어 본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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