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끼고..

[음반] 말러 교향곡 9번 - 아바도

sunis 2019. 2. 15. 09:42

 

아바도의 말러 교향곡 9번 음반은 내게 2종이 있다. 

빈 필과 녹음한 것과 만년에 베를린 필과 녹음한 것인데 대체적인 평가로는 아바도가 베를린 필과 연주한 음반이 선호된다. 나도 이런 평가에 대체로 동의 한다.  연주의 유연성이라는 측면과 강약 조절의 면에서 나중에 연주된 음반이 좀 더 듣기 편안것 같았다. 아바도의 말러는 젊은 시절부터 명성이 높았고, 내 기호와 취향에 가장 맞는 연주였다고 생각한다. 뭐랄까, 아바도의 연주는 깔끔하면서 과장이 없고 애매함이 없어서 느끼하지 않지만, 조급함이 없이 온화하게 음악을 만들어는 품위가 있기에 그의 연주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보편성이 높은 연주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취미의 영역에서 이런 아바도의 장점은 개성이 강한 연주를 좋아하는 취향을 갖은 사람들에게는 단조롭고 흠미가 떨어진다는 혹평을 받을 위험성도 늘 내포하고 있었다. 음악은 그래서 결국 혼자 듣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똑같이 음악 듣기를 취미로 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연주의 호불호는 해당 연주자나 지휘자의 역량의 문제를 넘어선 개인의 수용 가능한 감수성에 좌우되는 것이기에 같은 연주를 여러 사람이 들었다고 그 모두가 같은 감동을 경험하는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게시글을 올리고 다시 읽어보다가 내가 불로그에 글쓰는 방식의 문제점을 다시 확인했다. 장문의 글을 쓸 경우, 따로 다른 곳에 글을 쓴 후 퇴고를 해서 최종적으로 글을 올려야 하는데, 나는 습관적으로 바로 불로그 게시판에 글을 쓰는 버릇이 있어 쓰고 나면 유독 오타도 많고 모순과 오류도 적지 않게 발견되어 자주 수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수정 사항은 사후 시정이 되면 큰 문제는 아닐 수 있는데,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성급함으로 흔들리는 경우는 좀 문제가 된다. 즉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아바도의 2종의 연주 녹음을 다시 천천히 들어보게 되었는데, 빈 필의 연주와 베를린 필의 연주 중 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졌다. 해석의 여유와 확신이라는 점에서는 만년에 녹음된 베를린 필의 녹음이 앞서지만 악단 자체의 특성에 따른 연주력의 차이와 곡 해석의 정치함이라는 측면에서는 빈 필과의 젊은 시절의 연주가 한 발 앞선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돌아본다면 1988년 빈 필과의 말러 9번 연주는 매우 많은 말러 교향곡 9번 음반 중에서 가장 참신한 연주 녹음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위 사진을 클릭하면 아바도가 말러청소년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연주(2004년)를 감상할 수 있음

 

20세기를 전후한 세기말의 빈의 분위기 자체가 퇴폐적이고 멜랑콜리한 정서를 가득담고 있어서 그런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면 시각적으로는 강렬한 감각으로 사람의 눈을 끄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연상하게 되는데, 그런 맥락에서 2인의 구스타프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예술이 내 심상에 아로새겨지는 이미지는 거의 같은것 같다. 즉 적당히 화려하고 또 적당히 멋스러우면서 또 적당히 퇴폐적이고 또 적당히 염세적인 분위기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말러의 교향곡 9번은 다양하고 또는 서로 상충하는 감정이 뒤엉켜 그 결말을 명확하게 내리지 못한 미완의 작품을 보는듯 하다. 여기서 미완이라는 말은 작품성의 부족을 의미하기 보다는 불안과 혼돈속에서 힘겹게 자라 난 자아분열적인 말러의 교향곡 어법이 시대의 환호와 지지를 받아내지 못했음에도 유한한 인생의 숙명적 족쇄에 갇혀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인생 자체의 한계를 말한다. 각각의 악장은 따로 따로 들으면 그 자체로 아련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또 장난스럽고 유치하기도 하고 또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상주의적이기도 한데, 그것을 한꺼번에 묶어서 말하기에는 좀 주저되는 면이 있다. 그것을 <죽음>이라는 인생의 절대 명제로 설명하려는 평론가의 말도 일응 그럴듯 한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미학자가 말한, 인생이 추억속에서만 아름다울 뿐 현실에서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임을 확인하는 회고적인 서사라는 표현에도 공감이 간다. 말러의 교향곡은 사실 어느 곡이나 다 그 정서가 비슷하다. 즉 정제되지 않은 복합적인 감정이 뒤영켜 있다는 점에서는 예외적인 경우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 모든 전통적인 논리적 결함을 메꾸어 주는 것은 현란하게 소리로 재현되는 오케스트레이션 뿐이라고 하면 내가 말러에 너무 박한 평을 감행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말러의 결함으로 보지는 않는다. 모든 예술가 또는 모든 인간은 그가 살아가는 시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일단 받아들인다면 경박한 자기 모순으로 가득한 과잉 감정의 발산은 말러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말러가 살았던 세기말 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시대에 뒤진 노쇄한 제국의 수도 빈의 특징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칼 쇼르스케(Carl E, Schorske)는 클림트에게서 <회화와 자유주의적 자아의식의 위기>를 말했는데, 그 본질은 그의 그림이 상처 받고 약해진 자아의 징후라는 관점으로 이해 가능하다는 말이고, 그것이 곧 세기말 빈이란 도시의 모더니즘이 갖고 있던 숨길 수 없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특징을 당대를 살았던 말러라고 해서 예외적으로 부인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었으리라고 본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말러에 대해, 아니 말러의 음악에 대해서 매우 철학적인 글을 썼는데, 그것은 <말러, 음악적 인상학/Mahler, Eien musikalische Physiognomik>이란 책에 온전하게 담겨있다. 서가를 둘러보니 그 책이 보여 이리 저리 훑어 본다. 아도르노 역시 유대인이었던 만큼, 말러에 대한 모든 평가는 비록 그것이 부정적인 측면과 결핍과 결함을 지적하는 것에 있어서 조차도 궁극적으로는 말러 개인의 귀책이 아닌 분리와 구별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예술지상주의 또는 요즘 말로는 수구 기득권 세력에 의해서 박해받은 음악가의 불안한 음악으로 말러의 음악을 보는것 같다. 아도르노는 "예술 작품으로 하여금 의미 연관이 되게 하는 것 - 즉 현실성의 치욕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예술 작품을 밀폐시키는 가상을 비롯해 이것 저것 가리면서 까다롭게 선별하는 예술 작품의 면모 - 은 그저 단순히 사회적인 측면에, 자유로운 재료 구사와 그런 가운데 생겨나는 교양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특권을 손 대서는 안 될 것으로 보고, 예술 작품이라는 성전 가장 안쪽의 지성소에 가져다 놓는다." 고 말하면서 말러 이전의 음악과 말러 음악의 구별 지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도르노는 워낙 말을 어렵게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니 만큼 그의 말을 밑천으로 하여 말러의 음악을 이해하려 할 필요가 굳이 있을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말러 음악에 대해서 행해지는 모든 평가와 언설은 아도르노의 글에서 일부씩을 차용하고 인용하거나 심지어는 도용한 부분이 많은것도 사실이다. 만약 지적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러에 관한 책을 모두 읽어도 좋겠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면 제1장, <커튼과 팡파르>만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아도르노는 말러 음악의 이해는 전통적인 표제 음악과 절대 음악이라는 양식 범주를 넘어서는 직접적인 만남으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즉, "그의 교향곡은 이념을 도해로 그려 보여주는 대신 그 자체가 구체적으로 이념이 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하면서, "그의 교향곡의 모든 순간들 각각은 대충 얼버무린 것으로의 도피를 견디지 못하고 악곡상의 기능을 충족시키는 까닭에 그 순간의 그저 단순한 현존재 이상의 것이 되며, 자체에 대한 해석을 지시하는 문자가 된다." 하여 그의 교향곡이 갖는 기존의 음악과의 차별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런 말러의 교향곡 중 <대지의 노래-지상의 노래>를 제외하면 9번 교향곡은 사실상 그의 마지막 순수한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9번 교향곡은 소나타 양식을 갖는 비교적 느린 템포(안단테)의 제1악장에서 아름다운 선률을 주조로하여 시작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단지 우아하고 단정하고 매끈한 것이 아니라 머뭇거리며 반추해야 할 과거의 추억에 대한 회고와 같은 출렁임과 반복을 동반한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에 출렁이는 이미지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누구는 이런 말러 교향곡 9번의 1악장을 심장병을 앓고 있던 말러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너무 멋이 없는, 다소 상스러운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제2악장은 렌틀러 악장으로 정확하게는 렌틀러와 빠른 왈츠가 혼합된 스케르초 악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춤곡 양식이 말러의 교향곡에서는 그로데스크한 분위기로 표현되곤 해서 흔히 <죽음의 무도>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렌틀러의 주제는 여타의 다른 교향곡에서와 비슷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왈츠 주체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다소 장난스러운 행진곡 풍으로 거칠게 전개되어 그 느낌은 마치 부유하는 삶에 대한 냉소적인 야유를 신랄하게 쏟아내는것 같다. 그래서 2악장 전체의 분위기는 한가지 정서로 설명하기 어렵게 착잡한 감정으로 비틀어지기 때문에 제2악장은 단순하게 절망적이라기 보다는 냉소적인 체념과 자포자기의 분위기가 뒤섞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2악장과 이어지는 3악장의 대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느껴진다. 

 

나는 말러 9번 교향곡의 우열과 성패는 2악장과 다음의 3악장 론도 - 부를레스케 악장의 해석에 달려있다고 본다. 즉 몽환적인 선율미가 두드러진 1악장이나 치열하게 살아냈던 세상과의 이별을 집착을 버리고 천천히 받아들이는 종악장은 대부분의 지휘자들이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를 재현하는것 같다. 그러나 이 2악장의 복잡하고 착잡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지휘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냥 통속적인 죽음의 무도에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 왈츠로 양념을 쳐서 2악장을 처리하는 지휘자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바도와 바비롤리, 그리고 호렌슈타인은 2악장의 복잡하고 다소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나름 세심하게 구분하여 표현한 지휘자로 기억된다. 물론 가장 탁월한 해석은 존 바비롤리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비롤리는 원래 이런 중의적인 표현에 특화된 지휘자이기 때문이다. 

 

제3악장 론도 - 부를레스케는 진정한 의미에서 말러가 대위법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보여주는 갈라(Galla)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상충적인 성부에 실린 불안함이 가득담긴 절규와 체념적인 냉소의 동시적인 진행과 전개. 중간 부분에서는 이런 숨가뿐 질주가 잠시 숨을 고르며 과거를 다시 회고하는 듯 모든 악기들이 부를레스크 주제를 각자의 음조에 맞게 차례로 변주한다. 이어 오케스트라가 모두 동원되어 치열하게 부를레스크 에피소드를 전개한다.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은 슬프고 느린 아다지오 악장이다. 어떤 영화에서는 아주 짙은 구름이 덮인 어두운 대지에 먼지를 일으키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장면에서 이 곡을 사용해서 그 분위기를 적절하게 살렸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영화의 제목은 잊었다. 오직 음악만 기억에 남았을 뿐이었다. 말러 교향곡 9번의 종악장은 그 출발에서 첫악장과 그 성격과 분위기를 공유한다. 즉 빈의 이방인 말러가 힘겹게 살아온 음악가로서의, 아니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회고라는 성격과 분위기를 1악장과 그 템포가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유사하게 공유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라고 하는데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회고적인 주제를 천천히 곱씹는 느낌을 준다. 말러 교향곡 전체는 9번 교향곡의 종악장의 결말에서 파편화되어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추억이 된다. 더이상은 현재와 미래에 연관지어 과거의 아름다움을 회상할 여지가 없이 스러지는 덧없는 아름다움이다.

 

 

 

 

 

 


 

 

음악 듣는 버릇중에 내 방식은 아주 고약한 방식의 한가지 일것이다.

 

이번에도 말러 교향곡을 말하다가, 결국 10종이 넘는 말러 교향곡 9번 음반을 며칠 간 듣고 또 듣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스럽게 그렇게 농사일이 바쁜 시기가 아니고 날씨도 적당히 음산하고 어제 같은 경우는 비가 오기도 해서 말러 교향곡을 듣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즉 말러를 듣기에는 우선 시간이 충분해야 하고 날씨가 밖으로 나돌기에 불편한 경우가 유리하다.  역시 그간 들어왔던 각각의 음반에 대한 느낌들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고 또 새삼 세간이 평이 허명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가령, 말러 교향곡을 말할 때면 빠지지 않는 번스타인의 9번 음반은 내게는 베를린 필과 암스테르담 컨서트 헤보의 음반이 있는데 그 2종의 느낌이 다르고, 쿠르트 잔덜링의 음반도 2종이 있는데 BBC와 베를린 심포니의 음반의 느낌이 또 다르다.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던 삐에르 블레즈의 시카고 교향악단과의 음반은 예상외로 탑 클래스에 속할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확인 차 3번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은 지휘자 부르노 마데르나가 BBC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녹음한 <BBC 전설시리즈>의 음반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음반은 예전에 사서 처음 들으면서 참 묘한 느낌을 받았던 음반이었다. 즉 요즘말로 듣보잡 지휘자가 연주한 말러 교향곡 9번 연주치고는 무척 인상적이라는 건방진 느낌을 갖게 되었는데, 점점 정보가 쌓이다 보니 이 음반도 말러 음악애호가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는 음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을 두고 인상적인 말러 교향곡 9번 음반을 10여 종(넘을 수도 있겠지만) 골라서 간략한 음반의 특징을 정리해 두고 싶어졌다. 말러 교향곡 9번을 며칠간 수십번을 넘게 이 음반 저 음반 듣다보니 말러 교향곡 9번 음반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 것이다. 언제 포스팅이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4월이 되기 전에 마치지 못한 채 농번기를 맞게되면 결국 올 겨울까지 늘어질 수도 있을것 같다. 아무래도 음반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는 일이 바빠지면 포스팅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건 농사일이 아니라 과거 도시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즉 세상사에 바쁘거나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면 말러 음악을 들을 기회는 점점 적어지더라는.....(추/2019.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