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9번의 연주 녹음은 너무 많다. 그리고 연말이면 세계의 거의 모든 교향악단이 송년음악회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있으며 마지막 악장이 포함된 합창<환희의 송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래서 음악을 모르는 사람도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는 너도 나도 그의 교향곡 중 최고의 곡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그런데 정작 감상자의 차원에서 이 곡은 그 규모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그렇게 일상적으로 즐겨들을 음악은 아니다. 나 역시 아주 오래전에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기 시작할 때는 이 음반 저 음반 유명세를 따라서 음반을 사들이면서 비교해서 들어봤지만 1951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푸르트벵글러가 녹음한 연주 녹음을 접한 후에는 이 곡에 대해 더이상 명반의 구분이나 그 존재의 위계를 따질 의미가 없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런 이후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평소에 따로 음반을 골라서 즐기지는 않았던것 같다. 고작해야 사로 장만한 음반의 수준을 가늠하는 용도 정도였던것 같다.
그런데 이런 내게 과연 푸르트벵글어의 9번 이외의 음반은 그 가치가 이렇게 폄하되어도 괜찮은 것인가하는 의문을 갖게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푸르트벵글러의 음반 그 자체였다. 저작권이 시비가 사라진 음원이기에 언제부터인가 그의 음원은 이런 저런 어수선한 음반사에서도 마구 찍어내고 있었고 기존의 판권을 갖고 있던 음반사들도 음반시장에서의 상품성을 높일 목적으로 오래된 동일 모너럴 녹음의 숙명적인 결함이랄 수 있는 불규칙한 음압과 노이즈를 보정하여 그 소리를 개선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음반을 만들어 냈는데 그게 바로 부메랑이 되어 푸르트벵글러 녹음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고 다른 녹음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령 히틀러의 생일 축하 공연에 녹음되었다고 하는 1942년 베를린 필의 연주 녹음 음반도 내게는 2장이 있는데 같은 음반사인 MUSIC&ARTS 에서 출시한 2종의 음반은 처음과 나중의 소리가 달라져있었고, 최고의 명반으로 성가가 높았던 EMI사의 녹음도 내가 최초로 구입한 일본도시바 EMI의 음반과 이후 EMI본사에서 출시한 음반의 소리가 달랐던 것이다. 그러던 중 ORFEO사에서는 1951년 바이로이트 음악제 중 녹음된 다른 음원으로 제작한 음반을 출시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했는데 내가 들어본 바 그 음원은 무대를 중심으로 한다면 객석쪽이 아니라 무대뒤에서 녹음된듯한 느낌을 주었다. 즉 위대한 연주 녹음은 그 명성이 높아짐으로 인해 너도 나도 그것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이리 저리 단도질 되면서 그 고귀한 가치를 잃어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음반 시장은 이렇게 최소한의 상도의도 없는 돈을 중심으로 해서 끔찍한 무법천지의 장사판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10여년전 부터 따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새롭게 듣고 음반을 다시 정리해보게 되었은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내린 새로운 결론은 결국 오토 클렘페러의 베토벤 9번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일본 도시바EMI에서 1990년경에 리마스터링해서 출시한 푸르트벵글러의 바이로이트 실황 음반을 가장 사랑한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의 연주와는 다르지만 그에 못지 않은 엄청난 호소력을 갖춘 연주 녹음으로 나는 1957년 오토 클렘페러가 필하모니아와 함께 작업한 음반을 대등한 위치에 놓을만하다는 생각을 한다. 클렘페러의 연주와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는 그 규모와 엄청난 집중력이 투영된 연주라는 점은 같지만 두 사람이 음악을 만들어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푸르트벵글러는 같은 악장내에서도 빈번한 아첼레란토와 리타르단도의 구사로 템포의 변화가 심하고 대비가 큰 강약의 조절을 통해서 음악적 뉘앙스가 풍부한 반면 클렘페러는 대체로 인템포로 그 페이스를 꾸준하게 유지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얼핏 듣게 되면 클렘페러의 연주는 좀 단조롭고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특히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경우, 오디오 시스템이 해상력이 높지 않거나 다이나믹 레인지가 제한된 경우에는 조악한 음질의 푸루트벵글러의 연주에 더욱 환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오디오 시스템이 어느 정도의 표현력을 갖추고 있는 상황이라면 상황은 반전된다. 템포의 변화가 없는 클렘페러는 오케스트라 각 성부의 음들을 다층적으로 쌓아서 음악을 구축하고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각각의 세기와 여리기를 절묘하게 조절하고 융합하여 거대한 음악적 구조속에서 크고 작은 역동적인 파동을 일으키면서 입체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제1 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 파트를 근접 배치하지 않고 좌우의 양쪽으로 전개하여 배치하는 클렘페러의 오케스트라 구성은 중심부에 위치한 목관과 금관의 소리를 좀더 명료하게 강조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런 점도 각 성부와 파트가 결합하여 음악을 구성할 때 다른 지휘자의 연주에서는 듣기 힘든 오묘한 음향을 만들어 낸다. 맥문이 불여일청이라고 하던가? You Tube를 찾아보니 마침 클렘페러의 베토벤 9번 연주 자료가 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은 모두가 아는 음악이니 그 음악에 대해서 구구한 설명과 해석을 조잡하게 덧붙일 필요는 없다. 그냥 링크된 You Tube를 통해서 클렘페러에 대해서 내가 늘어놓은 구라(?)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울러, 내가 추천할 만한 다른 연주로는 1958년에 녹음되어 DG에서 출시한 페렌츠 프리차이의 음반이 있다. 이 음반을 통해서 베를린 필이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9번을 듣고 이후 카라얀이 같은 악단으로 3번에 걸쳐 녹음해서 출시한 음반을 들어보면, 헝가리 출신의 프리차이가 요절한것이 참으로 애석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리차이의 연주는 템포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음의 구축방식은 클렘페러와 매우 유사하다. 크럼페러와 프리차이의 2악장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템포의 차이가 두드러지지만(클렘페러의 Molto vivace는 차라리 Allegro ma non troppo에 가깝다) 오케스트라 음향의 특징이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클렘페러와 무관하게 프리차이의 이 베토벤 교향곡 9번 음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성취도가 높은 명반이다. 내가 아는 범위내에서 베틀린 필이 음반으로 남긴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첫번째 스테레오 녹음 음반이 이 음반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예전부터 이 음반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명반을 거론할 때 늘 언급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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