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는 Debt : The First 5,000 Years, David Graeber, 2011
번역서가 같은 해에 나와서 망설임 없이 번역서로 구해서 읽었던 책이다.
그러니까 2009년, 소위 말하는 서브프리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이 금융위기에 휩싸인 이후 이 책이 나왔기 때문에 관심이 높을 수 있었다. 이 책을 구입할 무렵 나는 비교적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서 모처럼 많은 책을 사들이고 읽을 때였던것 같다. 그런데, 시골에 와서 그동안 농사일을 배우랴 또 시골생활에 적응하려 번잡했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처음으로 다시 천천히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 연말에 서가에서 제일 먼저 뽑아낸 책이 이 책이었다. 아마도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느꼈던 어휘가 <채무노예>라는 말이었고, 그 말이 내가 시골로 낙향하는 결심을 굳히는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것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또 역사학자도 아닌 인류학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경제학적인 기본 지식이 어느 정도는 갖추어진 것을 알 수 있고 자료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이 취하는 방법론에 매우 밝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문화사의 측면에서 이 책을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인류학을 전공한 사람이 역사학의 경계를 넘어서기 어렵지 않은 것은 문화라는 기본 공통자산을 사회문화 구성주의적 입장에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역자는 이 책을 인류학자가 쓴 경제의 역사라고 보고있는데, 나는 그 말을 인류학자가 부채를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그 발전양상과 효과를 장기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것이라고 보아 부채의 문화사라고 바꾸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에서 부채의 의미는 경제적 또는 법적 개념을 훨씬 넘어 인간의 지각과 태도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서 제도화되는 수준까지 넓은 포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상식의 수준에서 인간사회의 경제적인 발전 양상이 물물교환을 시작으로 화폐경제가 발전했고 이후 신용을 통한 거래를 거쳐 금융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레이버는 인류 역사의 시작은 <신용-부채>에서 부터 시작했다고 본다. 이 책에서 저자가 역사를 통해서 일관되게 찾아내고자 한 것은 부채가 이중적인 얼굴을 갖고 있고 그것의 궁국적인 수혜자는 언제나 국가로 귀결된다는 결론이다. 여기서 내가 부채의 이중적인 얼굴이라고 말한 것은, 힘없는 개인 채무자에게는 부채가 늘 청산해야 할 의무와 책임감을 수반하지만 국가의 부채관리자인 발권기관과 금융자본가들에게는 부채가 알을 낳고 그 알이 다시 부채시장을 융성시키는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행태를 반복 순환하게 하는 측면을 말한 것이다. 과거 전쟁포로나 채무노예가 지금은 명목적으로 없어졌다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작게는 신용카드를 시작으로 할부구매와 주택담보대출등을 통해서 일상적인 삶의 과정이 채무에 얽혀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실질적인 의미의 채무노예는 자신의 재주나 노력을 노동시장에 내놓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결국 채무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저자의 견해는 그간 내가 늘 염두고 두고 있었지만 어떻게 꿰어 맞추어서 정리할 수 없어서 단편적인 문제의식으로 갖고 있던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을 설명하는데 충분한 도구로 활용할 수있다. 물론 그 문제의 해법은 또 별개의 것이다. 결국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덫에 걸리지 않거나 또는 벗어날 수 있도록 살아가는 외에 제도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2011년 말에 있었던 <월가의 시위-We are the 99%>가 결국 금융자본주의의 문제를 대중적 차원에서 거칠게 제기했지만 그 해결책은 결국 국가가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행한 구제금융이란 부채 부풀리기를 막거나 되돌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이 단지 1%의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주의에 기생하는 기득권층에 대한 비난만을 퍼붓고 끝난 점을 돌이켜 보면 명확하다.
우리는 더이상 신뢰와 공감 그리고 배려로 신용을 주고 받는 사회에서 살아가지 않기에 이제 타인의 자비나 국가의 자비에 자신의 삶을 의존할 수 없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특히 대중의 불만을 무마하고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각국 정부가 대중적인 회유책으로 제시하는 각종 복지정책의 궁극적인 부담자는 국민 자신(그리고 그 자식들)임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그러나 집단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이익을 남과 비교하여 형량하는 개인의 탐욕은 나도 남 못지 않은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기 마련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답은 있고 또 알고 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답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을지는 개인의 몫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인간성의 차별 요소일지 모른다. 나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스스로 채무노예의 굴레에서 벗아날 삶의 방편으로 시골로 하향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남겨진 우리의 아이들은 스스로 깨닫기 까지, 아니 어쩌면 깨닳았다고 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은 무거운 등짐같이 내 뒤에 남는다.
오늘은 서가에 있는 책들을 둘러보다가 몇 권의 책을 골라서 책상 한 켠에 추려두었다.
시간이 나면 틈틈이 다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본 것이다.
호이징하의 <중세의 가을>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 베르너 좀바르트의 <세 종류의 경제학>도 골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빅토르 타피에의 <바로크와 고전주의>다. 이 세 권의 책을 언제 다시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감흥이 예전에 비해 어떨지 한 편 궁금하기도 하다. 아 그리고, 세러 브래드포드의 <체사레 보르자>도 쉽게 읽을 수 있을것 같아 골라 두었다. 기회가 된다면, 어린 시절 읽었던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나 우상의 황혼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 그게 주경야독의 방식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골로 하향하여 1년을 지내면서 이젠, 음악도 듣고 책도 읽을 만큼 내 자신이 안정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사실 평정심이 없이는 음악도 책도 귀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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