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끼고..

[음반] 베토벤 후기 현악4중주곡 음반

sunis 2020. 6. 17. 14:02

베토벤 현악4중주은 모두 16곡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내가 듣는 곡들은 대체로 후기곡들에 한정된다. 초기, 중기, 후기로 대별되는 베토벤 현악4중주곡 중에 후기의 5개곡은 처음 음악을 들을 때는 감히 넘을 수 없는 고산준령으로 생각되었는데 이제는 4개의 현악기가 치밀하게 직조하는 베토벤 인생만년의 사색과 회고의 감정을 어렴풋이 공감할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현악4중주를 비롯한 실내악 장르는 감상자보다는 연주자에게 더욱 중요한 장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음악을 이해하고 또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진지한 음악 애호가들이 의기투합해서 음악을 만들어가면서 그 음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련되게 가다듬어가는 분야가 현악4중주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할텐데 듣는 사람들 역시 연주자들과 정서적 유대가 있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넓지 않은 공간에 모여서 그 연주를 편안하게 즐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현악4중주곡이 연주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음반 산업이 발전하고 음악 시장이 커지면서 실내악이라는 장르는 소규모의 공간에서 연주되는, 물리적 가청 공간의 제한을 전제한 음악이라는 전통적인 특성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발전된것 같다. 이런 변화는 반드시 바람직하지 못한것만은 아니고 장점도 있다. 가령 나같은 사람도 쉽게 현악4중주곡을 음반을 통해서 무시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기술의 발전과 음악 시장의 덕분이 아닐까 싶다.

 

크게 선율과 리듬으로 구성되는 음악의 골격과 강약과 완급으로 조성되는 음악의 세밀한 꾸밈이 조화를 이룰 때 그 음악은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음악의 연주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보편성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그런면에서 모든 음반은 다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겠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그 기호와 선호에 따라 선택되고 배제되는 숙명을 피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나는 이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곡 음반을 선호하는 것을 통해서 대략 그 사람의 특성을 가늠할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해서 특정한 인간이 중점을 두고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그 사람의 전체적 특성을 은연 중에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랜 기간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 현악4중주곡의 음반은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의 음반이었다. 특히 후기 4중주곡의 경우 80년대에 녹음된 스튜디오 녹음 연주를 최고의 음반으로 평가해왔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구분이 좀 부질없거나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짓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좀 더 다양한 음악 해석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정도로 수용성이 확장된 탓일 수도 있을것 같다.  어찌하다 보니 베토벤 현악4중주곡의 전집도 10여 종을 갖고 있게 되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솔직히 이것은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각각의 음반을 구입할 때는 정말 나름대로 절박한 호기심과 간절함이 있었다. 회한이 느껴지는 것은 어떤 상황을 경험하고 난 이후의 문제가 아니던가? 이런 생각이 갖어지게 된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전집이 있어도 실제로 듣는 것이 후기곡에 국한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알반 베르크의 연주를 좋아했는데, 이후 후기곡에 집착하다 보니 전집외에 따로 후기곡집을 따로 사서 모으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니까 알반 베르크는 89년에 실황녹음으로 2번째 베토벤 현악4중주곡 전집을 남겼는데 나는 이 중 후기곡집을 따로 구입했다. 스메타나 4중주단의 데논반 전집도 있는데, 어찌하다 보니 60년대에 녹음한 수푸라폰의 후기곡집을 따로 갖게 되었다. 그리고 부쉬 4중주단의 30년대에 녹음된 후기곡집이 있는데, 이 음반은 30년대에 녹음된 음반들 중 내가 아끼는 3종 중의 하나다. 그러니까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모음곡집, 아르투르 슈나벨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전집과 이 부쉬 4중주단의 베토벤 후기 현악4중주곡집은 내가 가장 아끼는 SP시대의 녹음이다. 이 외에 내가 즐겨듣는 베토벤 후기 현악4중주곡의 음반은 이탈리아노 4중주단의 필립스반, 아마데우스 4중주단의 DG반이다. 

알반 베르크4중주단의 2번째 실황녹음 음반

몇 년전 데카 레이블에서 타카시 4중주단의 베토벤 현악4중주곡 전집이 나왔을 때 비교적 최신반이라 관심을 갖고 구입했고 당시에는 기막힌 녹음상태와 기만하면서 치밀한 연주에 매우 이상적인 연주 녹음이라고 판단했고 득의만만했는데, 이 음반은 자주 듣다 보니 너무 기교가 과하게 투입된 연주라는 느낌이 들면서 좀 식상한 느낌이 들어 즐겨 듣지 않는다. 그외 대중적 지지가 높은 영국 출신 린지 4중주단의 베토벤 현악4중주곡도 나와는 맞지 않은것 같다. 이 느긋한 템포와 장중한 음향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끌어모은 음반은 타카시의 연주와는 상극적인데 그점에서 좀 너무 화장과 장식을 요란하게 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관심 중독에 걸린 중년 여인의 모습을 보는것 같아서 즐겨듣지 않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는 언제나 대체로 너무 과한 표현이 절제된 연주다. 조화와 균형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자극적이지 않은 개성으로 자기만의 특색을 드러내는 그런 연주가 좋다. 음향적으로도 특정한 대역이 도드라지거나 과장된 소리를 싫어하는 내 취향상 린지 4중주단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내 기호에 맞지 않는다. 실내악의 경우 더욱 더 그런 기준이 강하게 적용되는것 같다.

 

알반 베르크의 경우, 사람에 따라서는 그 연주가 매우 강렬하다고 하는데, 나는 4개의 현약기가 직조한 빈틈없이 촘촘한 소리를 통해서 견실한 음악적 표현을 느끼게 된다. 나는 흔들림 없는 조화와 균형의 안정감이 이 연주단체의 특장이라고 본다. 에머슨 4중주단의 경우 알반 베르크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에머슨의 치밀한 음의 구성과 거기서 나오는 응집력있는 소리는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을 능가하는 부분이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알반 베르크의 연주에는 빈 특유의 굴곡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악구의 진행에 따른 미세한 음영이 긴장이 이완될 여지를 없앤다는 점이다. 스메타타 4중주단의 후기 베토벤 현악4중주곡 녹음은 데논의 전집보다 60년대에 녹음된 수푸라폰반을 선호한다. 데논반은 일본인들 특유의 꼼꼼하고 치밀한 음반제작 기술(나는 데논의 악곡분석에 따른 악장별 인덱스 구분에 놀라게 된다)이 돋보이지만, 80년대의 데논반은 녹음탓인지 연주가 본래 그런것인지 모르겠지만 연주의 생동감이 떨어지는 평면적인 음향적 특성이 다소 아쉬웠는데 이 60년대의 연주 녹음은 이런 불만을 덜어낼 정도로 정밀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만년의 베토벤의 정서를 적당한 음성으로 잘 전달해주는 연주라는 느낌이 든다. 현재로서는 알반 베르크의 음반과 최고의 자리를 다툴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연주이다. 스메타나 4중주단 음반의 특징은 13번 (Op.130)의 종악장을 원래의 대푸가로 연주하여 녹음했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연주단체가 일반적으로 택하는 개정된 종악장은 말미에 따로 녹음했는데, 스메타나 4중주단의 13번 4중주곡의 종악장으로 연주한 대푸가는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후 다른 연주단체가 이와 같이 대푸가를 13번 4중주곡의 종악장으로 연주하는 사례가 많이 늘어난것에 비추어 보면 스메타나 4중주단의 결단은 매우 선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메타나4중주단이 60년대에 녹음한 음반

이탈리아노의 연주는 한 발 물러서서 사물을 관조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여유로운 연주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연주를 베토벤의 음악에는 맞지 않다고도 하는데, 그런 사람이 말하는 베토벤 음악적 특징이 무엇인지 궁금해 진다. 어쩌면 베토벤 음악의 최종 종착점에 위치한 현악4중주곡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탈리아노 4중주단이 설정한 진중한 템포와 서두름없이 전개되는 느긋한 곡해석이 타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마데우스 4중주단의 DG반은 60년대에 녹음된 전집인데, 사실 처음 들었을 때는 뚜렷한 개성이 없고 연주가 다소 경직된 느낌이 들었기에 오랜기간 방치한 음반이었는데, 들으면 들을 수록 과도한 꾸밈을 자제하는 정갈한 곡해석이 마치 단맛이나 자극적인 향이 더해지지 않은 맑은 생수와 같은 느낌을 주는 연주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딱 한 질의 전집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후기곡집을 포함하여 아마데우스 4중주단의 전집을 선택할것 같다. 이런 생각은 과거 알반 베르크에 경도되어 그들의 연주가 아닌 베토벤 현악4중주곡은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것에 비하면 많은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노4중주단의 전집 중 후기녹음 세트
아마데우스4중주단의 60년대 전집 녹음

마지막으로 부쉬 4중주단의 모너럴 음반을 언급해 두어야 할것 같다. 이 연주 녹음은 일상적으로 매일 들을 음반은 아니다. 그러나 문득 우리가 흘려보낸 시간의 아쉬움속에 떠올리고 싶은 한조각 추억이 그립다면, 안락한 일상속에서 간난스러웠던 옛시절의 간절함을 떠올리고 싶다면 문득 찾아서 넘겨보는 옛사진 담긴 앨범과 같은 음반이 아닌가 싶다. 이와 같은 음반은 내게 3종이 있다.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아루투르 슈나벨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음반 그리고 부쉬 4중주단의 이 베토벤 후기 4중주곡집과 슈베르트 현악4중주 음반이 그것들이다. 현악 4중주는 음악을 듣는 과정에서 아마도 가장 늦에 이해하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니까 교향곡과 같은 다양한 색채와 화려함 또는 장엄함이 느껴질 부분도 적고, 오페라와 같은 흥미로운 서사나 유머와 풍자도 없고, 솔로곡의 집중력 있는 몰입도 힘든, 마찰음이 뒤섞여 다소 혼란하고 미로를 헤매는것 같은 답답함이 이 장르를 뚫고 나가기 힘들게 했던것 같다. 그러나 현악4중주를 귀 기우려 들으면서 감동의 줄이 흔들리는 순간에 느끼는 희열은 다른 분야와는 좀 다른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이 현악4중주라는 장르가 음악 감상자의 마지막 영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쉬4중주단의 30년대 녹음 음반

이 글을 작성하면서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를 이것 저것 들었다. 그러다가 한쪽 구석에 유폐되어있던 헝가리 4중주단의 음반을 찾게되어 뒤늦게 들어보았다. 이 녹음은 1953년도에 프랑스 EMI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당연히 모너럴이다. 이 연주단체의 소리는 얼핏 체코의 탈리히 4중주단의 소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소리가 크지 않고 표현의 화려함 대신 연주자들이 음악의 내면적인 성찰에 집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에 녹음된 바릴리 4중주단의 세련되고 화사하면서 표정이 다양한 연주(나는 바릴리의 후기 4중주곡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와도 다른, 어쩌면 매우 소박한 연주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연주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이들이 58년, 68년 그리고 70년에 남긴 슈베르트의 후기 현악 4중주곡과 현악 5중주곡의 녹음에서도 이런 특징이 느껴진다. 그래서 만년의 베토벤이 외형적으로 드러낸 모습이 아니라 홀로 고독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그런 연주다. 헝가리 4중주단은 이후 60년대에도 스테레오로 베토벤 현악4중주곡 전집을 출반했는데, 이들이 그렇게 인기가 높지 않아서인지 스테레오 음반이나 이 모너럴 음반이나 절판이 되어 구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런데 여러 연주를 듣다가 헝가리 4중주단의 베토벤 현악4중주곡을 듣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음악에 빠져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중독성이 있는 호소력 짙은 연주다. 현실적인 조건상 대중적으로 추천할 수는 없는 연주 녹음이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은밀하게 친애하는 음반이다.

 

헝가리4중주단의 53년 녹음 전집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