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6번이 유명하고 그것이 명곡이라고 하지만 내가 그 말에 공감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즉 이미 세상에 알려진 평판에 내가 공감하기까지는 내 스스로에게 필요한 일정한 경험과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여름 농번기에 장마가 길어져서 집에 있는 시간이 제법 되는 탓에 그간 잘 듣지 않던 음반들을 주섬주섬 듣게 됬는데 그 중에 베토벤 교향곡 6번의 음반 몇 장은 그간 내가 건성으로 들어왔던 이 곡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기도 했고 그래서 왜 이 곡이 베토벤의 대표적인 교향곡 작품인지도 공감하게 되었다.
이 곡은 특이하게도 5악장 구성으로 된 교향곡이다. 이 곡이 작곡된 시기는 베토벤이 청각상실의 위기에서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어려워하던 시기라는 점, 그리고 상반된 분위기의 조성으로 이루어진 교향곡 5번과 거의 동시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즉 베토벤은 음악가(작곡가, 피아니스트)로서 가장 중요한 감각인 청각의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 그리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이 너무도 빠른 파멸에 직면했다고 느꼈을 때 스스로를 추스리고 싶은 의지와 함께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 곤경이라는 좌절감에서 방황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만들어 낸 곡이 교향곡 5번 c-mior Op.67과 교향곡 6번 F-major Op.68이라는데서 우리는 감상의 포인트를 찾으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교향곡 6번은 구조적으로 악장 구성과 악보에 기록된 각 악장에 대한 설명으로 인해서 음악적 이해를 쉽게 할 수도 있고 오히려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1악장 Allegro ma non tropo는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유쾌한 느낌>이라는 설명이 있고, 2악장 Andante molto mosso는 <시냇가의 정경>이라는 설명이 있으며, 3악장 Allegro는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이라는 설명이 있고, 제4악장 Allegro는 <폭풍> 그리고 끊임없이 연주되는 마지막 5악장 Allegretto는 <폭풍이 지나간 후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베토벤 본인은 이 곡이 음악을 통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마음에 느껴지는 정서의 표현이라고 했다지만 말이 한 번 비틀어진 것일 뿐 그 말이 그 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연의 묘사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겨냥한 회화가 아닌 다음에는 어차피 심정적인 공감이 가능한 정서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대상에 대한 묘사가 직접적일 수 없는 음악의 속성상 베토벤이 직접 부가한 설명은 이 곡을 이해하고자 하는 감상자를 구속하는 기능이 없을 수 없다.
자연과 인생을 접하는 마음이 각 지휘자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사자의 모습이 어떤지에 따라 이 곡의 연주에 대한 호 불호의 평가는 다양하게 갈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선 먼저 밝혀둘 것은 음반으로 나온 베토벤 교향곡 6번의 녹음 중 못들어 줄 음반은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내가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음반 몇 종만 거론하기로 한다.
제일 먼저 언급할 음반은 에리히 클라이버가 콘서트 헤보 오케스트라와 1952년 녹음한 데카반이다.
이 음반은 교향곡 5번이 함께 수록되어있는데, 녹음년도를 고려한다면 당시 데카의 녹음 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의 다른 레이블의 녹음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세밀한 음향이 포착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녹음의 수준은 스테레오 초기의 모노와 스테레오가 혼재하던 50년대말의 녹음을 듣는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음질이 좋다. 콘서트 헤보의 치밀한 연주력이 만들어 내는 2악장 시냇가의 정경은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준다. 절제된 현과 목관의 유기적인 조화가 더없이 아름답다. 대다수의 음악 애호가들은 에리히의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베토벤 연주를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카를로스의 연주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음에 언급할 음반은 오토 클렘페러가 필하모니아와 1957년에 녹음한 EMI반이다.
초기 스케레오 녹음이고 따라서 최초로 음반이 출반될 때는 모너럴과 스테레오로 출시되었다. 즉 아직 스테레오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6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스테레오 녹음이 음반으로는 모노와 스테레오로 동시에 출반되었었다. 물돈 현재 CD로 들을 수 있는 음반은 스테레오 녹음이다. 흔히 클렘페러의 음악이 규모가 크고 보폭이 넓으면서 템포 또한 느리다는 인식이 강해서 나 조차도 처음 이 음반을 구입할 때는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리고 이 음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도 음반을 구매한지 20여년이 더 지난 최근의 일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전원은 나이 잘 먹은 노인이 유유자적 시골을 산책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이 즈음의 필하모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력을 갖춘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아니었을까 싶다. 즉 전쟁을 전후하여 연주 인력의 이동이 많았고 또 전후에는 승전국과 패전국의 입장의 차이로 음악가들이 활동할 공간과 여건이 차이가 있었을 터인데 그 점에서는 유럽의 경우 영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렘페러의 필하모니아와의 녹음들은 대부분 뛰어난 연주력을 보여주는것 같다.
다음으로 언급할 음반은 칼 뵘이 빈 필과 녹음한 너무도 유명한 DG반이다.
이 음반은 베토벤 교향곡 6번의 음반을 말할 때 늘 발터의 음반과 함께 최정상의 자리를 다투어왔다. 나도 그런 다중의 견해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조금 다르다. 뵘의 해석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음반의 가치를 확정지은 것은 빈 필의 연주력이라고 본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연주단체인 콜럼비아 심포니와 발터가 남긴 CBS(SONY) 음반과의 비교로 뚜렷해진다. 나는 발터의 해석에 더 공감하지만 발터의 CBS 음반은 연주단체의 기량이 온전하지 못한 것과 함께 급조한 녹음 환경의 열악함 때문에 녹음상태도 대충대충 설렁설렁 뽑아낸 느낌이 짙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의 음향이 더러는 뒤석여서 뭉개지는 경우도 흔하고 관악 파트의 소리들은 균질성이 떨어져서 전반적인 연주에 음향의 유기적인 밀도감이 매우 부족한 녹음이다. 만일 발터가 그 시기에 빈 필과 베토벤 교향곡과 브람스 교향곡 그리고 모짜르트 교향곡을 남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 아쉽기 짝이 없다. 즉 빈 필의 흔들림 없이 주관이 뚜렷한 음색은 이 곡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고 그 빈 필의 자발적인 연주력을 잘 유도해 낸 칼 뵘의 능력이 발휘되어 잘 만들어 진 명반이라고 본다. 유일한 아쉬움은 첫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 느껴지는 유쾌함이 다소 무겁고 또 모호하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무념무상한 기분으로 시골의 공기를 호흡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는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후 곡은 2악장부터 빈 필의 뛰어난 연주력으로 매끄럽게 가다듬어진다.
다음으로 언급할 음반은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런던 필하모닉과 1992년 녹음한 음반이다.
텐슈테트와 런던 필이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6번 음반은 1980년대의 EMI반도 있다. 그런데 내게는 해당 음반은 없다. 이 음반은 런던 필이 음반사가 아닌 자체 레이블로 상업적인 음반으로 출시한 음반이다. 2000년대 이후 대형 음반사가 침체기에 빠지면서 상업적인 수지타산을 고려한 음반을 보수적으로 만드는 상황에서 각각의 오케스트라는 자체 제작 음반을 출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유럽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보이는데 대표적인 곳이 시카고 교향악단이다. 이 음반에 기록된 연주 녹음에 대해서 말한다면 현재 시점에서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연주 녹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섬세함과 명쾌함을 갖춘 음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각 연주 파트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자기의 목소리를 결점 없이 완벽하게 내주고 있고 텐슈테트는 이 훌륭한 소리를 매우 잘 조합하여 적절한 굴곡과 파동이 느껴지는 음악의 흐름을 만들어서 그 음악이 그려내는 각 악장의 모습은 모호함이나 이질감이 없이 명료하고 유려하기 그지없다. 사실 텐슈테트의 베토벤 교향곡 6번이 이렇게 뛰어난 연주일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고 단지 말러를 통해서 매우 감정의 진폭이 큰 말러의 모습을 그렸던 텐슈테트가 그려내는 베토벤의 모습은 어떨까하는 호기심으로 구입한 음반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큰 만족이었다.
다음으로는 원전주의의 입장에서 시대악기로 연주한 음반이나 소규모 편성의 절충주의적 연주 녹음 중 마음에 드는 음반을 찾아봤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을 만나지 못한것 같다. 흔히 언급하는 아르농쿠르(유럽 쳄버), 가디너(혁명과 낭만오케스트라), 프란스 부뤼헨(18세기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6번은 그리 인상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부뤼헨은 너무 평범했고, 가디너는 너무 성급하고 이질적이었고, 절충주의적인 연주의 베토벤 전집 중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아르농쿠르는 다른 곡에 비해 유독 6번이 아쉬웠다. 차라리 원전악기 연주로는 1987년 처음 녹음된 영국의 하노버 밴드와 로이 굿맨의 님버스 음반이 신선한 맛이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 음반은 대중적으로 크게 어필하지 못했고 또 현재의 시점에서 딱히 구입하기도 어려운 음반이므로 크게 강조할 것은 없을것 같다. 그외 현대 악기를 동원한 절충주의적 연주 녹음 중 그나마 내게 인상적인 음반으로는 다비드 진만이 스위스 톤 할레 오케스트라와 남긴 음반을 꼽고 싶다. 진만과 톤 할레의 전집의 모든 곡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6번 교향곡만은 수긍할 연주라고 생각한다.
그외 내가 좋아했다가 변심한 음반이 몇 종 있어 특기해 두고자 한다.
아바도의 빈 필과의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에 있던 교향곡 6번은 언제까지는 좋은 느낌으로 잘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곱고 부드러운 연주 이상의 사람을 잡아끄는 흡인력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시기(디지털 녹음 초기) DG의 녹음은 대체로 명료함이 떨어지는 모호한 점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런 음향적 핸디캡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후 2000년 베를린 필과 남긴 절충주의적인 연주 녹음도 흠잡을 곳이 없이 완벽한 연주임에도 역시 강렬한 흡인력이 아쉽다고 느끼는 것을 보면 이런 특징은 아바도의 베토벤이 갖는 아쉬움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부르노 발터의 CBS녹음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는데, 음반이라는 상품이 녹음이 정성껏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수명이 장수를 하기 어렵다는 예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70~80년대 리시버를 통해서 크지 않은 AR 스피커나 인켈등 국내의 콤포넌트 오디오로 음악을 듣던 시대까지는 CBS의 이 시대 녹음들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해상도가 극한에 이른 녹음이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 CBS의 스테레오 초창기 녹음들은 대체로 이런 공통적인 한계를 갖는것 같다. 즉 원본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포토샵으로 주물러봐야 잠깐 눈속임으로 사람의 주의를 끌 수는 있어도 깊은 감동을 지속적으로 전해주기는 어려운 사진의 경우와 같은 것이 음반 녹음이 아닌가 싶다. 발터의 녹음은 이후 SONY레이블에서 몇 번에 걸쳐서 리마스터링을 하면서 이런 저런 재주를 부려봤지만 마스터 테입에 담긴 녹음의 한계로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특히 나는 발터의 전원 음반을 꽤 비싼 값을 주고 초반 LP로도 갖고 있는데, LP로 듣는 것도 과거 슈어 등의 MM카트리지로 듣던것과 해상도가 향상된 MC로 듣는 것은 차이가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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