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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원전주의(정격연주)에 대한 생각

sunis 2020. 5. 29. 12:47

코렐리의 음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코렐리의 음악 그리고 바흐와 헨델의 음악까지 들으면서 문득 원전주의 연주(정격연주 authentic performance) 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로 연주의 경우에는 논의를 별도로 하기로 하고 콘체르토 그로소(합주협주곡)의 경우 90년대 이후 우후죽순 처럼 쏟아져 나온 원전주의적 연주가 어쩌면 대세를 이루었다고 볼 수있고, 60~70년대의 전통적인 연주들(현대 악기를 사용한 연주)을 찾아보기가 오히려 어려워진 현실에서 나는 두 종류의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면서 원전주의의 가치를 너무 일방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흐름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졌다.

 

음악은 "읽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것"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그 표현의 폭과 깊이를 얼마나 잘 드러낼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200년, 300년 전에 만들어진 음악과 그 음악이 기록된 악보를 현재의 시점에서 그간의 악기와 연주 기술이나 기법의 발전을 무시한 채, 전통 복귀라는 원칙에 따라 복제하는 것을 그 자체로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풍조에 나도 일부 동조(음반 구매)한 사람이지만, 며칠 동안 전통 연주와 원전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면서 음악을 들을 때 무엇이 더 좋았느냐하는 것은 원전주의자들의 전통 복제와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을 절감했다. 연주자는 결국 악보에 기록된 음악을 연주로 표현해 내는 것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는 존재라고 본다면 과거 전통의 복구가 그들의 음악적 성취로 인정받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음악 학자들의 몫이 될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연주자들은 그런 연구 성과를 현재의 음악적 토양에서 어떻게 반영하여 적절한 표현으로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이런 흐름은 비단 바로크 음악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막론하고 당대의 악기를 사용하고 당대의 연주기법(나는 실제로 연주기법의 시대성은 연주 역량의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을 재현하는 것을 선진적이고 학구적인 연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제법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고 본다.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교향곡 등의 경우에 그런 흐름은 너무도 뚜렷해서 오늘날에는 과거 전통적 낭만주의 스타일의 연주 녹음이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나는 대체로 악보의 원전주의에는 동의하나 그 악보를 현재의 개량되고 발전된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낡은 연주 관행으로 치부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현재의 악기 발전 수준과 연주 역량의 발전을 작곡가의 시대로 퇴행적으로 되돌리면서 표현의 폭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일을 선진적인 연주 스타일로 치켜세우는것을 주저하지 않는데, 이것이 적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현재의 고성능에 안락함과 편의성이 극대화된 자동차를 타고서 과거 포드 T형 차의 운전 스타일을 전통적인 운전법으로 주장하는 것과 같은 어색함이 느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원전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음악 시장의 판도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원전주의 운동이 대략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안에서도 나름의 시장 적응을 위한 진보와 개량이 꾸준히 이루어져서 연주의 내용이 사실상 현대 악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수렴하는것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초기 원전주의의 다소 투박하고 거칠기까지 했던 연주들이 오늘날에는 현대악기와 구분하기 힘든 정도의 세련되고 매끄러운 소리로 발전한 모습에 대해서 원전주의자들은 그것을 또하나의 진보라고 주장할 것인지 궁금하다. 사실 아르농쿠르와 같은 지휘자는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유럽 쳄버오케스트라(현대악기 연주단체)와 함께 원전주의적 접근방식을 선택해서 녹음했고, 그 이후 여러 연주단체가 현대악기로 연주하면서도 현악 파트의 인원을 대폭 줄이고 현악기 연주시에 비브라토를 억제하면서 원전주의적 흐름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연주와 60년대 70년대의 연주들을 비교해 보면 음악적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그런 느낌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적 울림을 공감있게 전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원전주의 연주와 전통적 연주는 각기 그 연주의 고유한 해석의 공감도로 평가되어야 할 문제에 불과하다고 불 수밖에 없을것 같다.    

 

음악은 언어로 치면 "글"이 아니라 "말"과 같다.

악보는 글일 수 있지만 그 악보를 표현하는 음악은 어차피 말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학 또는 미술과 공연예술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말은 가능하면 명료하고 모호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이 전달되는 대상과 상황에 적합한 높낮이와 크기가 획일적이지 않아야 보다 설득력이 높아진다. 음의 고저와 장단이 없이 그져 어린아이가 책을 읽는것과 같은 말로는 다른 사람에게 제 뜻을 온전하게 전하기 힘든것이 말의 숙명이다. 나는 음악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본다. 어떤 연주자(지휘자 포함)라도 모든 사람을 다 설득하고 공감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진실하게 드러내고 그런 자신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진솔한 말을 일관되게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면 음악의 해석과 그 해석의 결과물인 연주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평가될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나는 음악을 듣기 시작하던 어린 시절 이 무지치를 통해서 바로크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느꼈다. 그 연주단체가 모두 현대악기로 연주를 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후일 원전주의 연주단체들이 그 점을 특히 강조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나는 이 무지치가 내개 준 바로크 음악의 신선한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그 어떤 연주 단체가 대신 넘어선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위 사진을 클릭하면 이 무지치의 비발디 바순협주곡을 감상할 수 있음

헨델의 콘체르토 그로소와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칼 리히터의 연주로 들어보고 또 같은 곡을 원전주의자들의 연주로 들어본 후 든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이 생각이 다음에 어떤 경험의 계기에 또 다시 달라질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원전주의와 전통주의의 구분에 대해서 회의적인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가령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경우, 오래된 칼 리히터의 현대악기로 녹음한 음반은 생생한 음악적 표현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수연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외 내게는 4종의 원전주의 연주단체의 녹음이 있는데, 결국 그 중 트레버 피녹의 연주는 비록 원전악기 연주단체인 잉글리시 콘서트(The English Concert)와의 연주 녹음이지만 사실상 현대악기에 비해 음질적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명료하고 풍윤한 음향으로 경쾌하게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원전주의 연주와 전통적 연주의 구분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냥 음악을 누가 더 듣기 좋게 만들어냈는가가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짙고 뚜렷한 음색의 칼 리히터의 연주와 맑고 명쾌한 트래버 피녹의 연주는 각기 나름의 매력이 있어 내 기분에 따라 그 선택이 좌우되어 음악으로 다시 들려질 뿐이지 그외의 조건으로 선택과 배제의 구분이 행해질 문제가 아닌 것임을 절감했다.

 

사진을 클릭하면 칼 리히터의 뮌헨 바흐 오케스트라 연주 감상 가능

 

사진을 클릭하면 트레버 피노크와 잉글리시 콘서트의 연주 감상 가능 

 

 

 

 

사진을 클릭하면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You Tube를 통해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 감상이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