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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슈만(1810-1856)의 피아노 작품집

sunis 2022. 10. 23. 19:18

나는 슈만이 태어난 시대를 천재의 분출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슈만과 쇼팽은 동갑이고, 멘델스존은 슈만 보다 1년 앞선 1809년에 태어났으며, 리스트는 슈만 보다 1년 후인 1811년에 태어났다.  같은 시대에 음악계의 천재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명도가 낮은 사람은 아마도 슈만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 판단은 그렇다. 그런데 무엇보다 슈만은 동시대의 다른 천재에 비해 좀 복잡한 측면이 있어서 그 정체성을 일별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도 대중적 지명도가 떨어진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직전에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언급한 김에 슈만을 빠뜨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슈만은 어찌보면 멘델스존과 상반되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부유하지 않은 집안 출신의 슈만은 생계를 위하여 법률을 공부했으나 음악적 열망을 포기하지 못하여 피아니스트로 자신의 장래를 기약했으나, 피아니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작곡가로 길을 바꾼 인물이다. 그런데, 슈만의 이런 진로 선택의 혼란스러움이 어쩌면 슈만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훗날 우여곡절 끝에 아내가 되는 클라라와의 만남은 여러면에서 슈만의 자기분열적 자아를 잉태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좌절한 피아니스트, 동시대에 각광받는 천재들에 비해 한 발 뒤쳐진 듯한 자신의 세속적 성취, 그래서 음악평론가로서 음악을 말로 설명하고 논평하는 일로 자신의 허전함을 보충해야 했던 슈만은 자기 내부의 심적 갈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그 심리적 압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결국 정신질환에 빠지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무엇보다 어린 아내 클라라의 연주자로서의 성공적인 활동과 그것을 지켜보는 좌절된 야망을 품은 슈만의 심적인 고통은 그를 가장 괴롭히는 상황이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브람스라는 다소 음흉한 후배 또는 제자의 존재까지.....

 

슈만의 음악은 보통의 다른 천재의 음악에 비해서 쉽지 않고 그 정체성을 명확하게 분별할 특징도 뚜렷하지 않은 약점이 있다. 아마도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스승이었던 비크는 슈만의 재능과 성장 가능성을 가장 먼저 비관적으로 판단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다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할 개성과 대중적으로 어필할 특성이 뚜렷해야 하는데 슈만은 그런면에서 그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다. 쇼팽이나 리스트와 비교하면 이런 한계가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멘델스존은 어쩌면 당시에 슈만으로서는 넘보기 어려운 다른 세계의 축복받은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아노 독주곡들을 살펴보면, 당대의 시류에 비추어 가장 진지하고 도전적인 모습이 보이는것 같다. 즉 쇼팽류의 살롱 스타일의 화려함이나 달콤함과 구분되고 리스트류의 압도적이고 과시적인 기교주의와도 구분된다. 즉 슈만의 피아노 음악은 문학적 소양을 배경으로한 시적인 상징과 환상을 절차탁마 하듯이 추구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리로 재현되는 달콤함이나 장대함, 또는 현란함이 아니라, 피아노를 통해서 응축되고 집약된 정서의 표현에 집착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피아노 음악은 듣기에 편한 것이 별로 없다. 즉 귀에 쏙쏙 들어오거나 엄청난 전율을 느끼면서 현혹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슈만의 피아노 음악은 타성과 관성에 젖은 전형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신선하고, 그래서 각 연주자의 연주에 따라 더욱 풍성하게 해석의 다양성이 발휘될 여지가 많은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연주자의 입장에서는 녹녹하게 연주하고 음반을 발매해서 쉽게 성공할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난점도 있다고 본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그리고 모짜르트, 심지어 바흐와 같은 대가들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에 비하면 슈만의 피아노곡을 집대성한 음반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마나 내가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빌헬름 켐프의 4장짜리 피아노곡집이 비교적 슈만의 피아노 곡들을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정도에 불과하다. 인터넷을 통해서 검색을 해보면, 루마니아 출신의 다나 쇼칼리(Dana Ciocarlie)의 CD 13매 구성의 슈만 피아노 솔로 전집이 보이는데 국내에서는 품절 상태라 구하기 어렵고, 플로리안 우흘리크(Florian Uhlig)가 헨슬러에서 슈만의 솔로 전집을 녹음한것 같은데 국내에서는 전곡을 구하기 어려운것 같다. 그마나 아쉬케나지의 데카반이 7매 구성이고, 내가 즐겨듣는 켐프의 DG반이 4매 구성이며, 그외 유명한 곡들이 각각의 연주자에 의해 개별적으로 발매된 형편이다. 이런 상황은 슈만 피아노 음악이 결코 대중적으로 어필하기 만만한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켐프의 DG반에는 빠삐용(op.2),  다비드동맹 무곡(op.6),  카니발(op.9), 교향적 연습곡 (op.13), 어린이 정경(op.15),  크라이슬레리아나(op.16),  판타지 (op.17),  아라베스크 (op.18),  유모레스크 (op.20),  분터 블래터 중 노블레터(op.99  no.9), 피아노 소나타 2번(op.22),  밤의 소곡(op.23),  3개의 로만스(op.28),  숲의 정경(op.82) 이 수록되어있다. 슈만의 피아노 곡 중 유명한 곡들은 거의 망라되어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외 개별 음반으로 미켈란젤리, 미츠다 우치코, 아니 피셔, 코롤리오프, 머레이 페라이어 등의 몇 종의 슈만 피아노곡 음반들을 보충해서 갖고 있는데, 켐프의 연주는 슈만 피아노 음악의 특징에 가장 적합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톤으로 사색적인 표현에  최적화된 연주라고 여겨져서 애착이 많이 간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15매 내외의 슈만의 피아노 솔로 전집을 따로 구하지 않을 수도 있을것 같다.  여러곡의 연주가 수록된 음반이므로 개별적인 음악에 대한 설명은 다른 분들의 블러그에 있는 매우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다만, 성격 소품의 성격이 짙은 슈만의 소품 모음을 듣다보면 멘델스존류의 세필로 묘사한듯한 것과는 또 다른 강렬한 음영의 대비가 치밀한 묘사와 공존하는 플랑드르파의 고품격 회화를 보는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굳이 내 나름 슈만의 인생 작품이라고 딱 한 작품을 고른다면 크라이슬레리아나(Kreisleriana, OP.16)를 꼽고 싶다. 어쩌면 호프만이 묘사한 크라이슬러라는 인물은 슈만이 동경했고 또 그래서 스스로 크라이슬러처럼 살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런 느낌에는 늘 운명의 울타리에서 발버둥치는 인생의 덧없음과 애잔함이 함께 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내가 슈만의 피아노 연주에서 호로비츠보다 켐프를 선호하는 것은 이런 면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호로비츠의 슈만은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크라이슬레리아나에 국한하여 내가 애착을 갖고 듣는 연주는 아니 피셔가 1986년 4월 연주 녹음한  BBC 전설시리즈 음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