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끼고..

[음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sunis 2018. 11. 16. 19:36

 

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굳이 전집을 언급하는 것은 어차피 결국에는 전집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을 적지 않게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그냥 호기심 때문이었다. 즉, 80년대와 90년대에는 아직 우리나라의 음반시장이 협소하고 취급하는 음반도 대중적인 유명세가 있는 음반에 치우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몇 몇 음반은 실물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결핍의 시절을 살아온 세대에게는 유독 음반에 대한 욕심이 늦게까지 남게 마련이다. 그런 중에서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은 대부분의 클래식 애호가들이 이곡 저곡 탐색을 하게되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아이템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전집은 1930년대에 처음으로 전집을 녹음한 아르투르 슈나벨(Artur Schnabel) 의 EMI음반이다. 그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5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음반을 손이 닿는 대로 거의 빠짐없이 모으게 되었는데, 그건 단지 과시적인 소장 욕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연주 녹음을 들어보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이 이유였다. 그 중 내 기호와 취향의 변화에 따라서 일부는 남에게 양도 되기도 하고 또 음반 손상등의 이유로 페기처분한 것도 있다(내 시디 플레이어 중에는 유별나게 음반을 넣고 빼는 트레이가 얇아서 간혹 음반을 부주의하게 넣으면 음반이 중간에 물려서 스크레치가 생기는 것이 있다). 시골에서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여유있는 시간이 생기고 또 무엇보다 아파트에서 살던 때에는 아랫집이나 윗집의 눈치를 보면서 마음껏 듣지 못하던 음악을 새벽까지도 들을 수 있게 되자, 나는 그간 꼼꼼하게 듣지 못하던 음반들을 다시 천천히 듣게 되었다. 그 중 오늘 소개하는 2 종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은 시골에서 발견한 보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먼저, 1960년대 초반 출반된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의 VOX반을 언급하고 싶다. 

브렌델은 필립스 레이블에서 2회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출반했고, 그 음반들은 나름대로 가치있는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그런 세간의 평가가 내 기호와 맞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럴 경우 그런 음반은 일종의 계륵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다가 더러는 남에게 양도되기도 하곤 한다. 내게 브렌델은 늘 2%정도 무엇인가 모자란 느낌, 그러니까 음식으로 치면 양념이 무언가 하나는 빠진 상태로 조리된 음식을 먹는 그런 느낌을 주곤 했다. 그런데 60년대 초반에 녹음된 vox반은 그런 느낌을 불식시켜주는 명료한 자기 주장과 표현이 드러나는 연주 녹음이란 생각이 든다. 시대적인 조류가 그런것인지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실내악곡이건 관현악곡이건 과거 낭만주의적인 곡해석에서 탈피해서 보다 간결하고 깔끔한 음악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에서도 Harmonia Mundi에서 출반한 폴 루이스의 전집과 안드라스 쉬프의 ECM레이블 전집이 그런 흐름을 보여주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2종의 전집은 아마도 가장 정성껏 잘 만들어진 음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브렌델의 이 VOX반은 1960년대에 녹음되었으니 그런 최근의 흐름과는 궤를 달리한다. 적당한 양감이 살아있는 도톰한 음색과 투명한 울림으로 베토벤을 표현했다. 이후 필립스 레이블에서 들려준 음향과도 다르고 해석에서도 자기류의 명쾌함이 느껴진다. 브렌델은 베토벤 음악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적당한 심각성과 진지함외에 언듯 언듯 스치는 열정과 그 뒤에 숨은 음영 짙은 애잔한 그리움 등을 머뭇거림 없이 드러냈다. 이 전집을 어떻게 구했는지 기억이 명확하게 나진 않는다. 서울에서 나는 자주 교보문고 음반점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발견해서 집어들고 온 음반이리라. 이번 가을에 천천히 브렌델의 VOX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들을 들으면서 왜 브렌델의 이후 필립스에서 그 해석의 기조를 바꾼 것인지 궁금해졌다. 브렌델의 필립스반 베토벤 전집들을 모두 걷어 치울 수 있을뿐 아니라 모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중에서도 그 우열을 가려 높은 자리에 놓을 수 있는 명반이다. 이 음반은 2장씩 4권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소나타 20번(G major, Op49/2)과 소나타 3번(E flat major, Op. 7)은 따로 3매 구성의 변주곡집 음반에 숨어있다. 이 점이 이 전집의 옥의 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언급할 전집은 헝가로톤에서 발매한 아니 피셔(Annie Fischer)의 전집이다.

이 전집은 모두 9장의 음반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각 장의 곡 구성이 매우 산만한 점이 불만이라 꼼꼼하게 모두 듣지 못하고 간간히 다른 음반을 듣다가 비교하여 듣곤 했는데, 이번 가을에 전곡을 다 들어가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단지 여류라는 틀에 한정해서 그 가치를 따지기에는 피셔의 연주력과 베토벤 소나타 해석이 너무 크고 뛰어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레이징의 자연스러움과 아티큘레이션의 능숙함과 자유로움은 슈나벨을 떠올리게도 할 뿐 아니라 음의 확장과 신축의 절묘함, 그리고 곡의 주관적인 정서적 해석은 음악이 진행되면서 감정의 미묘한 끈을 부지불식간에 울리는 보편성에 닿아있어서 마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관현악으로 듣는 베토벤 교향곡을 떠올리게 할 정도이다. 그런데 정작 1970년대 후반에 녹음된 이 음원은 아니 피셔의 생전에는 출반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서 음반을 광고하는 간략한 설명에는 피셔가 극도로 녹음을 회피해서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음반 내지의 설명을 추적하다 보니, 피셔가 이 녹음을 할 당시에 너무도 세밀하고 꼼꼼하게 녹음을 진행해서 스스로 그렇게 짜집기해서 제작한 음반을 세상에 상품으로 내놓는것에 대해서 심적 부담을 느꼈던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즉 한 곡 또는 한 악장이 아니라 몇 음절씩을 나누어서 반복해서 연주하고 녹음한 후 이 녹음들을 연결해서 최종적으로 음반을 만들었던것 같다. 이런 방식에 대해서 아니 피셔는 연주의 일회성과 불가역성에 어긋나기에 진정한 자신의 연주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던것 같다. 그러나 기술이 접목되어 최종적인 상품으로 나온 결과물로 그 성패를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음반의 숙명이다. 실제의 연주가 아무리 좋았어도 그 녹음과 음반 제작에 문제가 있어서 청자에게 온전하게 음악의 느낌과 뉘앙스를 전달할 수 없다면 그 기록물은 좋은 음반이 될 기본적인 자격조차 갖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집은 모두 9장의 시디로 구성되어있고, 나는 이 낱장을 한 장씩 출시되는 대로 기다리면서 모았다.

 

 

 

 

이후, 올 가을과 겨울에 다시 들으면서 그 느낌이 달라지거나 변화가 생긴 음반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