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끼고..

[음반] 쿠벨릭의 말러교향곡 전집

sunis 2018. 5. 7. 22:03



위 음반 사진을 클릭하면 쿠벨릭이 연주하는 말러 1번을 YouTube를 통해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말러의 음반 탐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말러의 음악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것은 거의 2000년을 전후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에는 어떤 소스를 통해서 누구의 말러 연주가 좋다고 하면 반드시 내 귀로 확인해서 그 명성을 검증(?)하는 목적으로 음반을 많이 구입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던 중 가장 늦게 장만한 음반이 라파엘 쿠벨릭의 전집인데, 쿠벨릭의 전집을 듣고 나서는 그간 사모은 많은 음반들이 과도한 욕망을 호기심이란 명분으로 스스로에게 관대하게 방치한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말러의 스페셜리스트로 이름을 날린 전후 1세대 지휘자들 중에서도 쿠벨릭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집을 녹음한 지휘자에 속한다. 그런데 대중적인 지지도가 최상위 클래스는 아니었는지 쿠벨릭의 말러 전집은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 편은 아니었다.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로는 번스타인이 가장 유명했던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바도의 초기 전집을 낱장으로 하나씩 완성했고, 이후 베를린 필의 감독이 된 이후, 그리고 퇴임한 후 녹음한 신전집도 낱장으로 거의 다 사모을 정도로 아바도의 말러를 좋아했다. 그런데 쿠벨릭의 전집을 듣고나서는 대범하고 호방하게 말러의 음악을 술술 유창하게 풀어내는 연주에 반하고 말았다. 물론 이 말은 쿠벨릭의 말러 연주 녹음이 가장 뛰어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최근에 지휘자라면 아무나 다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풍토에서 각각의 지휘자가 자신의 개성을 각인하기 위해서 애쓰면서 세부적인 묘사에 너무 치중해서 음악의 큰 골격이 뚜렷한 경우가 드문것을 생각한다면 이미 60년대에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동원해서 이런 대범한 연주를 녹음한 쿠벨릭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만일 딱 한사람의 지휘자의 말러 전집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쿠벨릭의 전집을 골라잡을것 같다.


사실 말러의 음악은 내게는 애증이 교차하는 음악 중에 하나였다.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않고 음반을 중심으로 독학으로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나 같은 사람은 브람스의 큰 산을 넘고 나면 그 이후 나온 음악에서 큰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그 중에서 내게 유독 힘들었던 작곡가는 3명이었다. 바그너가 그 첫번째이고, 부루크너가 두번째이며 말러가 세번째의 어려운 작곡가였다. 그 중에서 바그너의 경우는 지금도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 몇 번 그의 오페라 또는 악극에 도전했지만 그의 반지 시리즈는 2질의 음반을 구해서 듣기를 시도하다가 결국은 완청하는데 실패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독일어 텍스트를 도저히 따라서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문제는 아마도 내 생애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역시 바그너의 반지는 그림의 떡으로 남겨질것이다. 반면 기악곡을 중심으로 한 부루크너와 말러는 음반을 이것 저것 골라가면서 듣고 나름대로 즐길 수 있는 이해도를 갖추게 되었는데 그 시간이 대략 10여년은 족히 걸린것 같다. 말러의 경우는 워낙 인기가 있어서 최근에는 음반이 넘쳐난다는 표현을 해도 부족할 지경인데, 그 해석에 대해서 내가 공감할 수준의 감정통제가 적절한 연주는 그렇게 많지 않은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말러는 번스타인의 신전집(빈 필 및 콘서트 헤보우등의 연주)이었는데, 그 때 나는 무척 말러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즉 너무 감정 통제가 되지 않아서 마치 독일판 라흐마니노프를 듣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편견은 아바도의 음반을 접하면서 수정되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연주는 감정의 조절면에서 이성적인 통제의 울타리를 넘지 않는 경우는 드믄편이라고 생각한다. 


쿠벨릭의 말러는 다 좋다. 세부적인 감정의 치밀한 묘사는 커다란 음악의 전면적인 스케일의 구도속에서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진다. 가령 3번이나 6번같은 긴 곡에서는 쿠베릭의 템포가 좀 너무 달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다른 지휘자에 비해서 현저하게 차이가 많은 편이라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달리 생각해 본다면 그간 대부분의 지휘자 그리고 대부분의 감상자들은 말러의 신경질적인 묘사에 너무 치중해서 미시적인 말러 해석에 치우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쩌면 쿠벨릭의 말러는 화려한 컬러사진이 아니라 빛 바랜 흑백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흑백 사진이 대상의 본질을 가장 인상적으로 각인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게는 쿠벨릭이 연주한 말러가 그의 음반 전집의 표지사진과 같이 단순한듯 하면서 또 무언가 아련한 상상의 여백이 제한된 프레임을 넘어서 펼쳐지는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내가 쿠벨릭의 말러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은 실황녹음으로 발매된 AUDITE레이블의 말러 교향곡 녹음을 4번을 제외하고 모두 한장씩 모았다는 것이다. (과문한 탓에 오디테 레이블의 쿠벨릭 멀러4번 녹음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