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책이 꼭 명작인 경우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 한 장의 명반>이라는 음반 해설서는 1988년 10월에 현암사에서 발행했다.
그 시절은 아직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못했고, 지금과 같은 SNS 관계망이 정보 전달의 신속성을 보장하는 시대는 아니었다.
어쩌면 활자와 소문이 정보전달의 주력으로 할약하던 시대의 끝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을 1989년 6월에 구입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을 탐색하다가 우연히 문에 띈 이 책은 그 표지 디자인이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시절은 lp가 아직도 음원 저장 매체의 주류였으며 cd가 막 소개되던 시절이었다. 내 경우에도 80년대 후반까지는 음악 감상의 주력 매체가 lp였었다. 물론 cd가 잡음 없는 환상적인 소리를 들려주는 미래의 매체라는 소식은 들려왔고 오디오와 관련한 잡지(주로 일본책)에서는 필립스와 소니에서 개발한 초기 cd플레이어에 대한 광고성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보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cd플레이어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내 기억에 우리나라의 cd 플레이어는 90년을 전후한 시기에 생산되어 출시된것 같다. 물론 그 시절에도 남보다 먼저 새로운 문물에 접하고자 하는 소위 얼리 어덥터(early adopter)가 있었다. 경제력이 있는 교양취미가들은 대체로 그 직업이 대학교수나 변호사 등이었던것 같다. 그들은 일제나 영국제 cd 플레이어를 구해서 명동에 나가면 간혹 볼 수 있었던 수입된 cd들의 주된 수요층이었다. 그때 cd 가격이 대략2~3만원 수준이었던것으로 기억한다. 80년 후반의 물가 수준을 고려한다면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cd 가격은 그 이후 점차 수요가 늘어나면서 대량생산과 시장규모의 확대에 따라 하락했다. 지금은 오히려 휴지조각 정도의 가격으로 만들어서 시장에 풀어 놓는 싸구려 재발매 박스물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절에 20대 후반의 나는 아직도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여 고단한 수험공부에 매진하던 처지였지만 그런 곤궁한 처지에서 느껴지는 문화적인 욕구는 오히려 더 간절해서 어떤 면에서는 절실하기도 했다. 그리고 듣고 싶은 음반은 많은데 그 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기 어려웠고 또 그 명반의 소문이 정말 진실한 것인지도 답답하던 시대에 내 눈에 띄인 이 책은 그야말로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았다. 나는 그 책을 집어들고 와서 읽고 또 읽으면서 간혹 내 음반 라이브러리에 해당 음반이 있으면 다행스럽고 행복해 했고 없는 음반은 다음에 꼭 찾아서 들어보리라 다짐했다. 지금보면 이 책은 그렇게 창의적인 명작이라고 부를만한 책은 아니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코멘트를 재인용한 것이거나 음반 설명이나 해설을 번역한 것이니까. 그렇지만 내게 이 책은 소중했다. 우선 음반을 고르는 나름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켜준 최초의 책이었고, 또 음반을 통해서 음악을 들을 때 그 느낌을 스스로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내게 알려준 유일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30년에 육박해가는 이 책을 그래서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다. 너무 많이 읽어서 제본한 접착제의 접착력 소멸에 따른 페이지 탈락 현상도 나타나고 종이는 이미 변색해서 황변을 넘어 갈변으로 까지 진전되었지만 나는 이 책을 볼 때 마다 내 가난한 청년시절의 간절함과 지금의 내 여유로움을 비교하면서 내 자신에게 위안과 격려를 건넬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책 방에서 이 책을 둘러보니 단행본이었던 책이 거의 시리즈로 확장하여 주제별로 그 권 수를 늘려서 하드커버로 나온것을 보았다. 역시 문화에서도 품격보다는 돈이 더 중요한 시대이니 그 세태에 따른 출판 양상의 변화를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나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뭔가 간절한 핵심을 관심있는 대중에게 제시한 후 그 이후의 진전 또는 발전은 후학에게 미루는 작가의 고결한 자존심을 보지 못한 서운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아쉬움을 주는 책은 또 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가 이와 같은 형태의 확장과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애초에 이 책들은 처음에 나온 딱 한권의 책으로 족했다고 본다. 또 그랬어야 그 책의 가치가 더 변함없이 시간의 풍상앞에 굳건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아쉬움은 있지만 내게 준 이 책의 고마움은 그런 아쉬움과는 별개로 엄연하게 불변하는 빚으로 남은다. 그 덕에 나는 수천장의 음반을 나의 안목으로 고르고 들어가면서 또 음반에 대한 내 나름의 평가(?)를 말과 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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