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이야기

나는 왜 농사를 짓는가?

sunis 2024. 6. 22. 10:58

이 문제에 대해서 최근 나는 나의 주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을 확인했다.

 

지난 주에는 딸내미와도 불루베리 선별과정에서 언쟁을 벌였는데

 

그 때 이 문제가 정확하게 주변에 인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내 아내 조차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이건 매우 모호할 뿐 아니라 허위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사람이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고 할 때, 농사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먹고 사는 문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품격이 달라지고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딸아이는 작은 불루베리를 포장에서 제외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짜증을 냈다. 나와 같은 기준으로 선별하면

 

일반 마트가 아닌 백화점이나 농장에 주문한 불루베리 수준일 것이라고 하면서 아비의 비현실성을 탓했다.

 

나는 특별하게 이상적이거나 박애정신이 넘처나는 인격자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매우 낙관적인 현실론자고 겉치례와 위선은 손등과 손바닥 같다고 보며 혐오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친구 조차도 1kg에 25,000원이라는 불루베리 가격을 믿지 못하고 500g포장당 25,000원인 줄 알았단다.

 

 

지난 주 찬거리를 사러 읍내 마트에 딸과 같이 갔다가 불루베리 250g이 포장된 팩을 보고 가격을 확인했다.

 

8,900원의 가격표가 붙어있었으니 1kg에 35,000원 정도의 가격이라고 봐야 했다.

 

문제는 그 불루베리의 크기가 우리가 포장을 위한 선별과정에서 모두 배제하는 수준의 크기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딸내미는 나름 합리적인 기준에서 작다고 포장하지 않는 과일이 아깝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불루베리 가격이 너무 낮다고 걱정하는 친구에게 오른 것은 미친 물가오름세 심리지 원가가 오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런 나의 태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비쳐졌고

 

나의 주변 사람들 대부분, 심지어 아내 조차도 이런 내가 답답하고 미련하다고 했었다.

 

이런 내모습을 지지하고 오히려 기특해 한 것은 오직 나의 아버지와 내 대학 동기 중 한 명뿐이었다.

 

 

아내의 사고는 어쩌면 이 지점의 오해와 인식차이에서 그 씨앗이 잉태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농사일이 없을 때, 무언가 부업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그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기면서도 일이 궂은 일이나 험한 일이 아니면 막지 않았다.

 

경제적 이득 못지 않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시골 생활의 무료함과 외로움을 덜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었다.

 

 사고전에 아내는 한 달간 일한 돈이 입급됐다면서 기뻐했었다. 그리고 불과 하루가 지나 사고를 맞이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기구하고 애석한 일이다. 

 

젊은 시절의 그 깐깐함과 단호함을 계속 유지했다면 그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까도 생각해 봤다.

 

 

내가 시골로 내려와서 농사를 짓게 된 것은 남이 만든 삶의 방식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월급쟁이 시절 기득권 제도의 정점이랄 수 있는 조직에서 일하면서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경우에 따라서 불복종 할지언정 그 방식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렇게 현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적응해 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남과 다를것이 없이 변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굴욕감이 쌓여갈 때, 내 눈에 띈 책이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책이었다.

 

내 나이 40 언저리에서 만난 이 사람들의 책에서 나는 현실에 불만을 갖고 그 현실에 적응하는 것은 부조리라고 느꼈다.

 

거대한 현실의 흐름에서 스스로 이탈하기로 한 나의 결심이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혜롭게 현실에 적응하는 길을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온전한 내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소규모의 가족농으로 대량생산 방식과 다르나 별스럽지 않고 소박한 농사를 통해서 내 삶의 방식을 관철하고 싶었다.

 

나의 방식대로 농사를 짓고, 나의 방식대로 판매를 하면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추하지 않게 살 수 있으면 족하다고 보았다.

 

야단스럽게 유기농이니 친환경 농법이니를 내세우지 않고, 내가 먹는것과 똑 같은 것을 주변과 나누는 것이 내 농법이다.

 

도시의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대량 생산된 농산물과 다른 방식으로 재배하고 수확해서 주변의 소수에게 판매하는 농사.

 

과거에 먹던 것과 맛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먹거리는 모두 그 생산방식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원인이 있다.

 

수십동의 비닐하우스에서 수십명의 인력을 동원해서 작물을 재배하고

 

정작 그 농산물의 수확은 생산자가 아닌 상인에 의해서 이루어져 시장에 나오는 농산물이

 

우리가 과거에 먹던 농산물과 같기를 바라는것이 애초에 가당치 않은 기대라고 봐야 한다. 

 

내가 기르고 수확해서 먹어본 것을 남들이 먹게 하는 과정이 온전한 농사라고 본다.

 

이런 설명을 딸내미에게 해주면서 불루베리 선별 논란을 매듭지었다.

 

 

인간은 자기반성이 가능한 유일한 동물이라고 본다.

 

성찰이 없이 욕망에 충실하고 그 욕망 실현을 간교하게 하는 것을

 

현명함이나 지혜로움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나는 애초에 형제자매가 될 수 없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그런 부류들의 조롱과 매도에도 스스로 전락한 삶을 선택하고 만족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본다.

 

세상 사람들이 편하게 말하는 원칙대로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자기변명에 동조할지 말지는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농사라는 것도 그렇다고 본다. 

 

세상을 비난하면서 그 스스로 그런 세상속에서의 삶에 동조하고 순응하는 것은

 

어쩌면 도덕성 없이 신앙을 내세우는 도덕적 편의주의자(위선자)들의 모습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위선자들의 정점에 있는 정치인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투표를 잘하라고 한다.

 

그런데 보다 나은 세상은 절대 남이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오직 각자 본인의  소임이 아니겠는가?

 

택배가 없어 불루베리 수확을 하지 않으니 온전하게 쉴 수 있는 토요일이다.

 

고단함 속에 누리는 모처럼의 휴식은 그래서 더욱 고맙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