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에 있을 딸 아이 혼사 문제로 아내가 간혹 서울에 올라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는 처 고모의 칠순을 맞아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고자 한다는 기별을 받고 아내와 함께 겸사 겸사 서울 나들이를 했다. 그 칠순 모임에 참석한 후 아내는 안사돈과 함께 한복을 알아보려고 일정을 잡아 두었다고 한다. 그 짬에 나는 오랜만에 광화문 나들이를 했다. 광화문은 내가 낳고 자라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장소라고 해야 할것 같다. 그러니까 고등학교까지 옛날의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사가 있던 신문로에서 나온 후, 잠시 대학과 군입대시를 제외하고는 다시 광화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그렇다.
내가 시골로 내려오기 전에는 몇 년간 소위 "촛불시위"를 비롯하여 광화문 일대가 조용할 겨를이 없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광화문 광장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정부종합청사 주변에서 대규모 시위가 조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드물었는데, 민주화의 열풍을 타고 2,000년도를 전후하여 시민들이 과거 금단의 땅으로 여겨지던 광화문 일대를 야금야금 밟아가면서 드디어 광화문과 청와대앞까지 시위장소로 점령하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사회 현상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는 법이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이곳에서 가타 부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 광화문을 다시 찾았을 때, 세종문화회관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소위 "태극기 부대"의 시위 인파를 보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언론을 통해서나 활발한 여론의 풀무질을 통해서는 그저 시간 남아도는 노인들의 회고적인 정치집회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그 시위 군중을 보면서 든 생각은 단순하게 진보와 보수의 대립구도로만 보기 힘든 세대간의 세상을 보는 간극의 크기가 예상보다 너무도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내가 보기에 절반은 맞고 절반은 너무 과장되거나 또는 심하게 왜곡된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시위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즉 자신들과 같은 관점과 이해를 갖은 집단이 모여서 벌이는 시위는 늘 자신의 주장을 극한적으로 과장하여 미화하고 정당화하여 드러내기 마련이고 반대편의 주장은 폄하하고 곡해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의 처절한(?) 모습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교보문고를 찾았다.
장소가 사람에게 미치는 작용은 적지 않은것이 당연하겠지만, 내게 광화문의 교보문고는 각별한 장소로 와 닿는다.
좀 더 어린 시절에는 종각 옆에 종로서적이라는 대형서점이 있었다. 그런데 새로 지은 대형빌딩의 지하에 넓직하게 자리잡은 교보문고가 생기고 나서는 종로서적이 점차 그 기세가 축소되면서 쇄락을 길을 걷다가 결국은 문을 닫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보문고는 늘 우리나라 서점의 변화된 모습의 정점을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월급쟁이 시절에도 퇴근길에는 서둘러 교보문고에 들러 1시간씩 책이며 음반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과 음반을 사서 귀가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든 습관탓에 나는 적지 않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은 초로에 접어드는 지금에 까지 혼자서 심심하지 않게 놀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이 줄었고 그래서 출판사며 서점, 그리고 문필가들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친다고 하지만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는 내 마음에는 늘 넉넉한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설레임이 함께 하기 마련이었다. 이번에 모처럼 찾은 교보문고에서 나는 아주 반가운 서적을 발견하였다.
바로 페르낭 브로델의 <필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라는 책이 그것이다.
브로델을 알기 전에도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인물과 사건에 대한 관심이 주조를 이루지 않았을까 싶다. 비로소 페르낭 브로델을 알게 되면서 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 양자가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역사속의 "지속성"이라는 요소를 새로 발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서 변화하는 것들에서 발전과 진보의 모습을 포착하기를 즐겨하지만 브로델은 유독 긴 시간의 흐름속에 면면히 이어지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지속성을 규명하는데 평생의 노력을 바친 역사학자가 아닐까 싶다. 브로델의 지속성은 화석처럼 굳어진 유물과 폐허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오랜 세월 동안 갖은 풍상과 부침의 파동속에서 강인하게 지켜온 요인들이 갖는 역사적 추동력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추적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브로델의 입을 빌어 브로델과 그 이전의 역사연구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기존의 연구들은 여러 의미에서 낡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광대한 해양이 아니라 아주 작은 모자이크 조각이며, 역동적인 큰 생명이 아니라 군주들과 부자들의 몸짓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두는 역강하고 완만한 역사와는 관련이 없는 먼지와 같은 사소한 것들이다.>
내가 처음 브로델을 알게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저작에서 나는 문명 차원의 자본주의가 단순한 경제시스템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그런 관점을 최초로 집약해서 제시했던 책이 바로 브로델의 이 "지중해"라는 저작이기 때문에 나는 교보문고에서 이 책을 본 순간 얼버붙은 듯이 꼼짝을 하지 못하고 책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가에는 3권의 책이 있어는데, 완역본의 경우 4권이기에 1권을 더 직원에게 찾아달라고 해서 4권 모두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책을 사보기도 했지만 그 오랜만의 책 구입이 그간 아마존을 통해서 영문판을 살까하고 망설이던 책이었다는 점에서 그 기쁨은 더욱 컸다. 프랑스인인 브로델의 원 저작은 당연히 불어로 발간되었고, 이후 20세기 역사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이 책은 이미 영어 버젼으로 몇 번 나왔던 적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감히 번역에 나서는 사람이 아직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나마 이런 책을 번역해 낼 용기를 낸 역자들과 출판사 <까치>에 고마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런데, 춮판사 <까치>는 좋은 책을 정말 멋없이 만드는 묘한 특징이 있다. 대체로 두꺼운 책을 얇은 표지의 페이퍼백으로 만들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제본한 책 어께가 꺾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점이 내게는 늘 불만이다. 외서 처럼 하드커버나 페이퍼백으로 구분하여 가격을 달리하여 시장에 내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협소한 우리의 도서 시장의 특성상 그런 기대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나마 역서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영문판으로 읽는 것에 비해 시간과 노력을 절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한 감사를 느껴야 할 것이다. 그간 틈나는 대로 천천히 읽어오던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는 잠시 미루어 두고 브로델의 <지중해>를 먼저 맑어야 겠다. 마침 때가 농번기인 지라 제 아무리 주경야독에 박차를 가한다고 해도 대략 2,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을 완독하려면 이 여름이 다 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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