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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리스트/ 순례의 해 Années de Pèlerinage 3권/LESLIE HOWARD

sunis 2019. 11. 18. 23:24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는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을 이해하는데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순례의 해>는 비교적 오랜 기간(50년 남짓)을 두고 완성된 작품이라서 작품의 규모와 내용에서 리스트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큰 흐름의 변화를 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순례의 해>는 이 곡의 소재가 된 리스트의 "사랑의 순례"가 시작된 1835년의 경험과 기억을 기반으로하여 이 기간 중인 1835년에서 1836년에 작곡한 곡들이 먼저 1848년 <나그네의 앨범>이란 이름으로 출판된그 중에서 추려낸 곡들을 개정하여 <순례의 해, 첫 해>를 1855년에 출판했다고 한다. 두번째 해의 순례는 1837년 부터 1847년 사이에 작곡되어 1858년에 악보의 출판이 이루어졌으며, 마지막 해의 순례는 1867년에서 1877년 사이에 작곡을 하여 1883년에 악보의 출판이 이루어졌으니 한 작품의 완성에 이르기 까지 소요된 기간이 참으로 긴 작품이다.

 

 

 

 

 

이 곡은 19세기 유럽 상류층의 고급스러운 여행 취향이 음악의 형태로 담긴 점이 특징이라할 수 있다. 

즉, 외형적으로는 여행을 통해 받은 심상의 느낌들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을 꼼곰히 추적해 보면 당시 유럽에 널리 퍼진 고급스러운 교양에 대한 갈망이 이 순례의 해에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즉, 단순한 정경의 묘사나 여행 중의 감회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여행 과정에서 접한 자연 풍광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작품과 여행지를 대표하는 인물의 문학 작품 및 유력 가문의 별장과 유물 등에 이르기까지 회고적인 교양 취미의 소재가 골고루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순례의 해>를 음악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음악을 듣는것외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인문학적 에피소드들을 이해하고 보다 상세한 작품 노트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배경 지식이 없이 만일 직접 음악으로 바로 들어가서 듣는 것으로 음악적 감흥을 맞보려 한다면 매우 고단한 주변 배회와 방황의 반복에 그칠 우려가 높다고 본다.

 

곡은 3부로 나뉘며, 첫번째 해는 9개의 곡, 그리고 두번째 해는 7개의 곡에 추가적으로 보충한 베네치아와 나폴리 3곡, 그리고 세번째 해에는 7개의 곡 등 모두 26개의 곡으로 구성된다. 

 

첫번째 해의 배경은 스위스이고 이 안에 9개의 곡이 담겨있다.

 

1. Chapelle de Guillame Tell  빌헬름 텔의 성당

2. Au lac de Wallenstadt  발렌슈테트(Walen 호수에 인접한 지명이다) 호수에서 

3. Pastorale  전원

4. Au bord d'une source  샘터에서

5. Orage  폭풍우

6. Vallée d’Obermann  오베르망의 계곡

7. Églogue  목가

8. Le mal du pays  향수

9. Le cloches de Genève  제네바의 종

 

첫번째 해의 대부분의 작품은 1848년의 <나그네의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골라서 개정한 것들인데, 앨범의 출판과 함께 소개된 각 곡의 설명에 따라 인상적인 부분을 확인하면, 대부분의 소재들은 문학적인 배경을 전제로 그 의미가 해석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리스트는 당시 실러, 바이런 등의 시에서 언급된 순례지의 느낌과 이미지를 자신의 음악적 소재로 참조했기 때문이다. 빌헬름 텔 성당이라는 건축물이나 발렌슈테트 호수와 오베르망의 계곡이라는 지형과 전원 및 샘터등의 소소한 자연적 풍광 그리고 목가나 향수 등의 정서는 당시 낭만주의 시인들의 목가적인 동경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방랑이라는 주제와 연관이 깊다. 그러고 보면 리스트는 단지 피아노라는 악기를 잘 연주하는 기능적인 연주자이기에 앞서 전인적인 교양을 추구한 예술가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검색을 하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정보들 중 상당부분은 확인 작업을 거쳐 나름대로 검증 후 확신이 생긴 내용이기 보다는 다른 전거를 조급하게 인용한 미숙한 부분이 적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첫번째 해의 각곡에 대한 이해는 문학적인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정도로만 정리해 두고 싶다. 가령, 실러나 바이런 등의 시에서 차용한 내용이 리스트의 순례의 해 첫번째 해에서 소재로 많이 활용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원전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부분은 그 내용을 재인용하는 것 조차 주저된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두번째 해의 배경은 이태리이고 이 안에 7개의 본곡과 3곡의 보충된 곡이 포함된다. 

 

1. Sposalizio  혼례
2. Il Penseroso  생각하는 사람
3. Canzonetta del Salvator Rosa  ["사랑의 감정"을 담은 Salvator Rosa의 노래를 소재로 함]
4. Sonetto  47 del Petrarca---
5. Sonetto 104 del Petrarca-->   [이 세곡은 이태리 최초의 서정시인이라 불리는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를 소재로 함]
6. Sonetto 123 del Petrarca---
7. Aprés une lecture du Dante-fantasia quasi sonata  단테를 읽고 - 소나타 풍의 판타지  

 

  Venezia e Napoli

1. Gondoliera  [대중가요'작은 곤돌라 위의 금발머리 처녀'를 소재로 함]

2. Canzone  [로시니의 오델로 중 '곤돌라 사공의 아리아'를 소재로 함]

3. Tarantella [나폴리 음악가 고트로의 주제를 차용했다고 함]

 

 이 두번 째 해가 나는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첫번째 해는 대체로 스위스의 여행 과정에서 마주하는 대상을 문학적인 관념을 거쳐서 소재로 한 반면, 두번째 해의 이태리편에서는 귀부인과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리스트가 보인 관심의 대상이 매우 다양하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첫곡의 혼례는 밀라노의 미술관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성모 마리아의 결혼>이란 그림이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곡인 Il Penseroso(생각하는 사람)은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로렌조의 무덤에 세워진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소재로 삼아서 작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호기심이 강하게 든 것은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였다. 그래서 검색 신공을 발휘하여 해당 소네트를 찾아보았다. 

 

소네트 47/ Benedetto sia'l giorno 축복이어라.

 

축복이어라. 그 날, 그 달, 그 해,

그 계절, 그 무렵, 그 시각, 그 순간, 

그 아름다운 마을, 내가 이른 곳이여.

그대의 아름다운 두 눈이 나를 사로잡았던, 

또한 축복이어라, 그 달콤한 첫 고통이여.

내가 사랑에 빠져 맞었던,

그리고 내가 표적이 되었던 화살들과 그 활, 

나의 심장까지 미친 그 고통들이여. 

축복이어라, 그 많은 음성들,

내가 라우라의 이름을 부르며 뿌려댄 눈물들, 탄식들,

그리고 그 절절함이여.

또 축복이어라, 모든 종이들이여, 

내가 님께 바친 찬미로 가득한,

그리고 내 생각들이여, 오직 님 만을 향한, 

다른 이에게 조금도 곁을 내주지 않은.

 

소네트 104 / Pace non trovo 나는 평화를 얻지 못하였으나.

 

나는 평화를 얻지 못하였으나, 싸울 무기도 없으며,

떨고 있으나 희망을 품고, 또 불타 오르나 얼음이 되네.

하늘을 날기도 하지만, 땅바닥에 곤두박질 치기도 하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지만, 온세상을 두 팔로 끌어안네.

사랑은 나를 감옥에 가두고, 

열어주지도 꼭 닫아주지도 않고,

또 나를 자신의 포로로 잡지도, 끈을 풀어주지도 않네.

사랑은 나를 죽이지도 않으나, 

쇠고랑을 풀어주지도 않네.

내가 살기도 원치 않고, 또 나를 곤경에서 구하지도 않네.

나는 두 눈이 없이도 보며, 또 혀는 침묵하나 절규하네.

또 나는 죽기를 열망하나, 도움을 청하고,

또 나는 내 자신을 증오하나, 타인을 사랑한다네.

나는 고통을 먹고, 울면서 웃으며,

죽음과 생명이 내게는 똑같이 기쁘지 않네.

여인이여,

당신 때문에, 나는 이 처지에 있다오. 

 

소네트 123 / I vidi in terra angelici costumi  나는 보았네 지상에서 천사의 자태를.

 

나는 보았네, 지상에서 천사의 자태를,

그리고 세상에 유일한 천상의 아름다움도. 

이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기쁘고도 괴로우니,

이는 내가 보는것 모두가 꿈이요, 

그림자이며, 연기 같아서이다. 

또 보았지, 그대의 아름다운 두 눈이 눈물 흘리는 것을,

수 천번이나 태양의 질투를 샀던

또 들었지, 한숨지으며 하던 말들을.

신들을 움직이고 강물을 멈추게 했던 그 말들을.

사랑, 지혜, 용기, 자비 그리고 고통이 

훨씬 감동적이면서 달콤한 조화를 이루었고, 

우리가 세상에서 늘 듣던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또한 하늘은그 조화로움에 너무도 잘 어울려, 

나무가지의 잎새마져 미동도 없어 보였으니,

달콤한 공기와 바람으로 꽉 차 있었다오. 

 

위 소네트의 내용은 potamia님의 다음 불로그 <음악은 기도다> 에서 빌려 옴.  

 

 

세번째 해의 배경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내용상 이태리로 보인다. 세번째 해에는 7개 곡이 담겨있다.

 

1. Angelus! Prière aux anges gardiens   안젤루스 - 수호천사에의 기도 

2. Aux Cyprès de la Villa d’Este I   에스테가 별장의 사이프러스 숲 1
3. Aux Cyprès de la Villa d’Este II   에스테가 별장의 사이프러스 숲 2
4. Les jeux d’eaux à la villa d’Este  에스테가 별장의 분수
5. Sunt lacrymae rerum, en mode hongrois  슬퍼할 것들 - 헝가리풍으로
6. Marche Funèbre  장송행진곡 -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언을 추억하며
7. Sursum corda  마음을 고양시킬 것  

 

세번째 해의 곡들 중 인상적인 것은 에스테 가문의 별장이 등장하는 곡이다. 에스테 가문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페라라 지방을 근거로 하여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같이 문예적 후원자로 큰 역할을 한 명문가인데, 아마도 리스트는 문예의 후원자이던 에스테가문의 빌라를 찾아서 많은 생각에 잠겼던것 같다. 세번째 순례의 해는 첫번째 해와 두번째 해에 비해서는 곡에 대한 집중도가 다소 이완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즉 소재의 신선함이나 착상의 기발함도 눈에 띄지 않고 다소 개인적인 회고와 감상에 치중한 느낌이 짙다.   

 

이상의 내용은 내 스스로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듣기 위해서 정리해 둔 내용들이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선행된 자료를 기반으로 했고 일부는 음반 내지의 설명을 참조했다. 특히 <순례의 해 - 두번째 해>에 포함된 페트라르카의 소네트를 소재로 한 음악을 들으면서 해당 소네트의 내용이 궁금했었는데, 마침 구글 검색을 통해서 potamia님의 불로그에서 귀중한 내용을 발견해서 매우 반가웠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채 우선 출처만 밝히고 그 내용을 빌려왔다. 여기서 해당 불로그의 주인께 고마운 말씀을 남겨둔다. 

 

 

 

 

 

이 <순례의 해>의 음반은 대략 리스트의 음악이란 것을 전제로 명인기를 기반으로 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는, 리스트의 재래라고 찬사를 받았던 역시 헝가리 출신의 조르주 치프라의 음반을 해당 곡의 명반으로 치고, 그 이후 라자 베르만의 DG반이 가장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 명반인 형편이다. 나도 라자 베르만의 음반으로 이 <순례의 해>에 입문했다. 그러나 베르만의 연주가 딱히 어디가 모자르다고 꼭 집어서 말하기는 뭣한데 좀 더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연주 음반은 없을까 물색하다 우연히 몇 년전 광화문의 교보문고 음반 코너에서 히페리온 레이블의 3장짜리 음반을 발견했다. 연주자는 레슬리 하워드 Leslie Howard란 호주 출신의 피아니스트다. 사실 이 연주자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3장의 음반으로 구성된 <순례의 해>세트를 새롭게 구입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레슬리 하워드는 리스트의 음악 녹음에 관한 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워낙 학구적인 사람이라서 리스트 음악에 깊이 천착했었고 그런 연주자를 발견한 영국의 히페리온 음반사에서는 레슬리 하워드와 리스트 전곡 녹음이라는 전대미문의 거대 사업을 벌인 것이다. 100장에 육박하는 cd 분량의 엄청난 리스트 피아노곡을 한 사람의 연주로 녹음하기로 기획하기는 쉽지 않을 일일 터인데 이것을 해낸 영국의 음반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흔히 말하는 선진국의 기준에 이런 부분은 특별하게 지표로 고려할 수 없지만 직관적으로 느낄 때 이런 문화사업에 투자하고 성과를 쌓아가는 풍토가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레슬리 하워드의 연주는 기존의 명인기를 내세운 연주자들의 연주와 비교하면 매우 소박하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이 음반을 구입한 것을 후회했었다. 그런 느낌의 배경에는 히페리온사의 음향 특성에 대한 불만도 작용했다. 이 음반사는 매번 좋은 기획으로 매우 흥미로운 음반을 만드는 반면 그 음향적 특성은 명쾌하지 못하고 다소 무르거나 흐릿한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음향 특성을 주조로 하는 녹음에 수록된 하워드의 연주 또한 매우 온건한 것이어서 다소 맹숭맹숭한 연주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며칠 간 흐리고 비바람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천천히 음반을 꼼꼼하게 듣다 보니 이것이야 말로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리스트라는 이름에 동반되는 강렬한 이미지를 음악적으로 치환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온화하고 다감한 모습의 리스트의 심상과 그의 음악적 풍요로움이 조급하지 않은 단정한 모양새로 음반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순례의 해>의 음반 중에 빌헬름 켐프가 전곡을 녹음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한다. 켐프는 DG에서 두번째 해에서 마지막 곡 '단테를 읽고'를 빼고 녹음한 음반을 딱 한 장 출반했다 . 그 음반을 들을 때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아울러 알프레드 브렌델과 졸탄 코치스의 음반도 아쉬움이 남는다. 브렌델이 2번째 해 까지만 녹음을 하고 3번째 해의 순례는 코치스가 녹음한 것으로 음반을 출반했는데, 브렌델과 코치스가 각각 전곡을 연주 녹음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브렌델의 2번째 해 순례에는 베네치아와 나폴리의 보충 3곡의 녹음이 빠진것도 유감이다. 그런데 음반이란게 또 그런 아쉬움을 남기는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켐프의 완벽한 연주가 있었고 내가 그 음반을 모두 갖추어서 만족하게 들었다면 나는 켤코 레슬리 하워드의 새로운 음반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여담인데, 리스트라는 작곡가의 피아노 음악은 상당한 중독성이 있다.

비슷한 시대를 함께한 쇼팽의 경우와는 다른 묵직함과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쇼팽의 유약한듯하면서 매우 감성적인 음악과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다르다. 다른 각도에서는 리스트 음악의 단점으로 지나친 과장과 과시가 언급될 수도 있을 것이나 최근 몇 장의 리스트 음반을 천천히 들어 보면 다른 음악에 대한 궁금증이 자꾸 솟아 오른다. 대략, 피아노 소나타와 2곡의 협주곡, 그리고 순례의 해를 중심으로 몇 장씩의 음반이 있는데, 이걸 좀 더 확장시키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