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농한기에 할 수 있는 일 들

sunis 2021. 1. 28. 14:42

시골에 이사하여 3년의 농사를 경험하고 이제 소위 말하는 농한기를 보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해 본다. 

먼저, 농사짓는 규모와 양태에 따라서 농한기는 과거와 같이 온전한 의미의 쉬는 시간이 아닌 경우도 적지 않은것 같다. 나의 경우만 돌아보아도 대략 비가림 하우스에서 재배한 고추를 모두 정리하고 빈 밭에 볏짚을 뿌려 밭을 갈아 놓으면 대략 12월이 다 간다. 그러니까 연말까지 농사일에서 온전하게 손을 놓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리고 1월 중순이면 고추씨를 선택해서 모종을 내야 하니 사실상 농한기라고 할 만한 긴 휴가기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일의 집중도와 농사일에 투입되는 시간의 총량을 고려하면 대략 나의 경우 12월에서 1월 중순까지, 그리고 고추모종을 종묘사에 의뢰해서 육묘해서 정식하려고 하면 대략 3월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제법 있게 된다. 이 시간이 시골생활에서는 중요한것 같다.

 

대략 원주민들은 이 때 각종 모임별로 여행도 다녀오는 일이 많은데 금년에는 코로나로 인해서 그런 단체 여행은 대부분 없어진 형편이다. 나의 경우도 12월 하순에서 구정까지의 기간을 온전한 휴가기간으로 여겨서 그 때 미루어 두었던 서울 나들이를 해서 그간 못 본 사람들도 만나고 또 서울 바람을 쐬기도 하는데 금면에는 역시 코로나 사태로 그것이 여의치 않은것 같다. 물론 작년 연말에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룬 후라 그 이후 대폭 가라앉은 심리상태로 침체된 분위기에 있었기에 이런 저런 시간 보낼 일거리를 찾지 않은 탓에 겨울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면도 있다. 그런데 작년의 경우를 돌이켜 본다면 이 때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책도 좀 집중해서 볼 수 있고 미루어 두었던 개인적인 관심사에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있기도 하다. 어제는 그간 다 읽지 못했던 책이 한 권 있어서 다시 꺼내서 보니 중간부터 보기도 애매하고 처음부터 보고 싶은데, 문득 책을 모두 옮겨 적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면에는 자주 손으로 글을 쓰지 않으니 점차 글씨도 그 꼴이 사나워질 뿐만 아니라 한자와 영어의 경우 간혹 문자로 쓰는데 혼돈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자판을 두드려서 글을 쓰는 습관이 우리에게 준 폐해가 은연중에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을 한다. 

문제의 책은 지식의 역사(A History of Knowledge/Charles Van Doren)란 책이다. 이 책은 당시 다른 책을 보다가 인용된 책인데 그 내용을 좀 더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서 산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찾을 당시에는 국내에 번역본이 없어서 부득이 영문판을 사게 된 경우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번역본이 대개 일본 역서를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말이 외국말보다 더 어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문맥이 매끄럽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는 번역이 질이 상당히 개선되어서 굳이 역서가 있다면 원서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이 책을 다시 읽는것외에 필사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이유인데, 그것은 첫째 문장이 매우 마음에 든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내가 영어 단어의 철자를 잘못 쓰는 경우가 적지 않을 뿐 아니라 글씨의 모양도 그리 보기 좋지 않음을 느꼈기 때문에 이 번 기회에 내 낡은 영문 실력을 좀 가다듬을 필요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400페이지가 좀 넘은 분량이므로 읽기에도 또 필사하기에도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미 1월이 다 지나간 상황이라 이번 농한기에 필사를 다 마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시골살이의 즐거움 중에 소위 농한기에는 이렇게 평소 같으면, 또 번잡한 도시생활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을 해 볼 수 있다는 점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사작업을 하다가 다 못하면 이어서 다음 농한기에 하더라도 한 번 해 볼 요량이다. 노트에 옮겨 적으면 몇 권의 노트가 들어갈지 모르겠다. 

 

겸하여 서가를 둘러보니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은 책이 적지 않다. 내 서가에 자리잡은 책들은 모두 서울에서 사서 읽어나 또는 읽기를 중단했던 책들인데 읽었던 책들 중에도 그 내용이 또렷하게 상기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경쟁적으로 서둘러서 책을 읽어치웠던 탓이 아닐까 싶다. 책은 꼼꼼하게 되새기면서 읽어야 하는데 젊은 시절 시험공부 때 책을 일었던것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개인적 관심으로 읽었던 책들은 꼼꼼함과 치밀함이 좀 많이 부족했던것 같다. 그래서 농한기에는 책 읽기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독서에 푹 빠져보는 것도 시골살이의 큰 이득이 될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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