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를 돌아보면 지금보다 훨씬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음악 한 곡을 듣고 책 한 권을 읽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게 보였던것 같다. 지금은 음악을 듣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클래식 음악을 말한다. 그러면 클래식 음악만이 음악이며 대중음악은 음악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건 음악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욕망의 충족에서도 스스로 선택하여 자신의 즐거움을 채워가는 학습 능력이 있다는 것일 터인데, 그냥 흘러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좋다는 느낌을 갖는 것으로는 인간의 인지능력과 감수성 발달에 어떤 이익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냥 외부 자극에 길들여지는 적응(익숙함)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책을 읽는 경우에도 해당한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에 이어폰을 달고 다니는것 같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정보를 대부분 접하는것 같은데, 자신이 직접 책을 읽으면서 어휘의 뉘앙스와 문맥의 의미를 짚어가며 생각과 느낌을 가다듬는 것과 남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역시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속된 말로 줏어 들은 이야기는 많은데 스스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능력은 없는것 같다. 늘상 남의 이야기가 자신의 판단의 근거가 된다. 스스로의 생각으로 사물의 조리를 판단하는 능력은 거의 퇴화한것 같다.
물론 옛날에도 모든 사람이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경험을 통해서 보면 대략 인문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음악과 특히 책을 필수적인 교양의 원천으로 여겼었고,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그런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다양한 문화 상품을 시장에 내놓았던것 같다. 그 시절에는 유독 세계문학전집이니 한국문학전집이니 하는 전집물이 방문 판매원의 꼬드김을 통해서 중산층 가정의 거실의 한쪽에 그럴듯한 문화적 장식물로 자리를 잡는 세태가 있었다. 그것을 산 사람은 본인이 읽을 목적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자식들은 자기보다 좀 더 문명 개화된 사람다운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소망도 반드시 담겨 있었다고 본다. 그외 주머니가 얇은 젋은이들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각종 출판사가 문고본을 앞다투어 내놓기도 했었다. 또한 그 시절에는 미군 부대를 통해서 그 유통경로가 명확하지 않은 오디오가 유포되었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소위 전축과 오디오 세트가 월부로 판매되던 시절이었다. 그 때 데모용으로 제공된 한 장의 음반이나 카세트 테이프에는 조잡하게 편집된 음질 좋은 음악의 편린들이 있었는데, 그 오디오를 통해서 시중에서 유행하는 유행가를 듣기도 했지만 자식이 알아들을 수 없는 팝송을 듣거나 또는 요란하고 복잡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보면서 역시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아갈, 좀 더 개명된 내 자식의 모습을 기대했었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되었나?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스마트폰에 눈과 귀를 붙이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그 스마트 폰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어떤 유익한 것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매우 절망적으로 본다.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를 개인이 직관적으로 선택하여 섭취하는 방식은 인간의 인지능력이나 감수성의 발전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보는게 나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르는 것은 없이 다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남에게 설득력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이, 자신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정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는 쥐떼 같은 사람들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그런 쥐떼 같은 사람들의 결집된 호감을 근거로 집단지성 운운하는 것은 매우 슬픈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성이 없는 다수의 호 불호에 따라 결집된 견해를 집단 지성이라고 한다면, 낯선 사람을 보고 짖어대는 동네 강아지들의 합창도 집단 지성의 하나라고 보지 못할 이유가 없을것 같다. 각자가 다양한 공론의 과정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형성한 독립적 관점과 견해가 모였을 때, 비로소 집단 지성이라는 말에 근접한 내용과 무게를 갖을 수있을 것 같다. 지금은 그냥 선동과 편가름에 경박하게 휩쓸린 군중의 성마른 함성이 집단 지성의 왕관을 쓰고 행세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된 이면에는 개별 인간들이 스스로 인지능력과 감성을 발전시키는 학습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동적으로 정보를 섭취하는 습관에 길들여진 탓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한마디로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데도 그것을 깨닫고 분노하는 것은 항상 한 발 두 발씩 늦은 세상이 되었다.
세태라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니, 장기지속적인 관점에서 변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교육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인데, 지금은 교육 분야에서도 그런 좋은 변화를 기대할 여지는 거의 없는것 같다. 결국 아주 오랜 시간을 통한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비로소 각성에 이르게 되어 반성적인 성찰에 이르지 않는 한 좋은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졌다. 이런 내 생각은 확실히 너무 비관적이다. 그런데 내가 속한 이 세상이 비관적인 다음에야 어찌 이런 현실을 다른 말로 애써 꾸미면서 거짓을 말할 것인가. 세상을 향해 아부 할 필요가 없이 세상에서 한 발 물러 서서 은둔자와 같은 삶에서 평온함과 소소한 만족을 구하는 나로서는, 현실을 넘어서는 기대와 희망에 내 남은 정열을 쏟아 부을 마음이 없다. 부디 올 한 해 별 탈 없이 조용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올 해 소망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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